은행에 다녀오던 길에 뭔가 이마 위로 ‘포르르’ 날아 내리기에 떼어보니 벚꽃 이파리였다. 봄철이 되어도 별로 내려가지 않는 난방비 때문에 아파트 관리비를 내면서 잔뜩 찌푸려졌던 내 얼굴이 깃털보다 보드라운 봄꽃의 간지럼에 화들짝 놀라 펴졌다. ‘아, 그래…. 벚꽃 철이구나!’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옛 연인의 전갈이라도 받은 양 허둥대는 마음이 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니 어린 꽃잎들을 매단 벚나무 가지들이 하얀 레이스 장막을 휘황하게 드리우고 있다.
남들은 벚꽃 구경을 일부러 하러 오는 동네에 살면서도, 복잡한 세상사에 마음이 휘둘려 꽃이야 피건 말건 나 몰라라 지내온 무심함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고정희 시인의 어떤 시가 생각나며 묘한 감회가 일어난다.
‘맞벌이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씨 / 일곱 달 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 창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 아무도 모르게 / 죽음의 잠을 향하여 /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현대시사에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오른 ‘우리 동네 구자명씨’란 시의 일부이다. 30대 초반 새댁시절의 나를 모델로 쓴 작품인데, 고정희 시인은 이 시를 쓰고 내게 보여주면서 사람 이름을 실명으로 해도 되겠냐고 물었었다. 그 당시 나는 시건 소설이건 문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좋을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국어교사로 재직하는 나의 지인들은 이 시를 학생들에게 노상 가르치면서도 내가 그 실제 인물이었으리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가사 노동과 직장 생활이라는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며 식구들의 안식을 보장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지닌 현대여성’이란 교과서의 페니미스트적 해석과는 동떨어진 인상을 주변에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40대 초반에 안타깝게도 요절하여 더는 친분을 나눌 수 없게 된 고정희 시인이 나란 사람에 대해 한 가지 잘 짚어낸 것이 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꽃이 피는지 지는지 잘 모르고 산다는 것. 페미니즘과 아무 관계도 없는 그 사실은 내가 인간의 일에만 쏠린 나머지 자연과의 교감에 얼마나 소홀하고 서툰지를 잘 말해 준다고 본다.
자연과의 교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자연을 통해 전달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을 잘 즐기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이와 달리 고정희 시인은 내가 기억하기에 자연 교감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지금도 어쩌다 길가 풀숲에서 개망초가 무리지어 핀 것을 보게 되면 ‘와~’ 하고 나도 모르게 환호하게 되는데, 이것은 고 시인이 그 꽃을 그리 좋아하며 탄성을 지르던 것이 마음속에 각인되어 개망초만 보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대체로 ‘꽃보다 사람’ 쪽인 셈으로, 사람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 짓기 전까지는 자연의 미적 가치에 감응이 잘 안 되는 좀 이상한 천성을 타고난 듯하다.
개망초를 사랑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던 고정희 시인. 그는 어느 여름 평소 좋아하던 지리산을 찾았다가 계곡 급물살에 휩쓸려 많은 아낌을 받던 문학인의 명(命)을 놓아버렸다. 한편 먹고 사는 현실에 올인 하느라 자연도 문학도 몰라라 했던 나는 지금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으니, 인생 유전의 무상하고 헛갈리는 흐름을 뉘라서 가늠할 수 있으리.
올해는 강가 벚꽃길이라도 거닐며 꽃들의 향연을 눈여겨보리라. 그 두려우리만큼 눈부신 아름다움의 덧없는 황홀을 느껴보면서 꽃들이 어떻게 자기 삶을 완성하고 떠나는지 지켜보리라. 봄날은 가겠지만 다시 찾아올 훗날의 봄을 위해 꽃들이 어떻게 자신의 유한한 생명을 써버리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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