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대학생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리포트를 받은 적이 있다. 오늘을 살아가며 고민하는 대학생들의 자화상이 그들의 글속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자기의 존재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인식 방식이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쉬운 제목의 리포트에 가볍게 달려들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고민 고민한 끝에 나름대로의 리포트를 시일에 쫓겨 제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생들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자화상을 그리고 있어 다행이지만, 예상외로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적이며 비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흔히들 주위에서 세상이나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라’고 교훈처럼 말하지만, 학생들은 정작 자신을 그렇게 보지 못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사람, 현재의 이탈된 삶을 후회하는 사람, 열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소외된 사람, 앞으로의 취업이나 장래 문제에 심각한 사람 등 이 모두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학생들의 부정적인 자화상이다.
독일의 로터(H.Rotter)는 그의 저서 「도덕의 기초」(Grundlage der Moral)에서 인간이 참된 삶을 영위하는 계기를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초월자와의 관계라는 3자를 조화롭게 이루는 데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의 관계’ 설정은 무시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눈에 보이는 ‘타인과의 관계’만을 중시한다. 우리 신자들 중에도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중시하다가 정작 자신과는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고 상처받은 상태에서 남을 인정하고, 더구나 보이지 않는 초월자인 하느님을 인정하기는 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리포트에서 학생들이 자기를 비관하고 부정하는 자화상은 청년들이 자신과의 관계설정에 혼란을 겪은 상처라고 본다. 나아가 오늘날 청년들의 고민은 청년 실업 등 외부의 문제에도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 설정 문제, 정체성의 위기에 더욱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5월은 성모성월이다. 이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에 청년들은 스스로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적?비관적 관계에서 긍정적?희망적 관계로 바꾸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것이 자신과 화해하여 스스로를 사랑하고 긍지를 찾는 길이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은 불행히도 자기와의 바른 관계의 설정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진리를 자각하는 데에는 많은 방황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오래전 학창 시절 나는 집안이 가난하여 등록금 내기도 힘들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으며, 학교 성적도 노력한 만큼 나오지 않아 좌절감에 사로잡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사춘기 시절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여 이성 앞에 서는데도 자신감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만을 비판하는 ‘부정적인 나’로 인해 한동안 방황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고통 속에서 아내의 도움으로 30여 년 전 성당에 나가게 되었고, 그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면서 ‘작은 성취’에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오늘도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의 청년들이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올바르고 긍정적인 자아 형성을 위해서는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믿고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리포트에서 긍정적인 자아를 드러내 보인, 자신 있게 글을 쓴 학생들은 대부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젊은이들이다. 말하자면 초월자인 하느님을 알고 체험한 학생들의 자화상이 가장 자신 있게 그려져 있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긍지를 갖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청년들은 변화무쌍한 세속적인 가치와 기준에 의해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끝없는 젊음의 욕망에 의해 오히려 가치관의 혼란만 더 겪을 뿐이다.
교회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 우선순위는 자신과의 화해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은 곧 청년들에게는 자기 자신을 아는 전제이며, 이웃 사랑의 토대이다. 청년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통해 먼저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하여야 한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이 오늘처럼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는 싱그러운 5월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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