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도 원하시던 큰 아들의 육사입학을 보신 아버지께서 그해 12월 1966년 12월 19일 47세의 생을 서울교육위원회에 출장 가시던 중 고혈압(뇌출혈)으로 아무도 보는 이 없던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다섯 남매만이 이 세상에 남은 것이었다. 자식 하나 출가시키지 못하시고 유언 한마디 없이 출장 중에 돌아가시다니. 그날 새벽에 아버지께서 일찍 서울로 가신다고 세수하시고 진지 드시던 모습이 나로선 마지막이었다.
그날 어머니도 서울서 공부하는 작은 언니, 오빠의 뒷바라지를 위해 아버지는 새벽에, 어머니는 나중에 올라 가셨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우리 식구들은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5일장으로 치러진 아버지의 영결식엔 집안 어른들과 두 오빠만이 참석하여 산소까지 다녀왔으나 어머니와 우리 자매들은 집안에서 장지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때 조사를 하신 분은 어느 교육감님이셨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슬프디 슬펐던 영결식장에서의 조사를 어머니께서는 재봉틀 서랍에 넣어 두시고 보고 또 보며 눈물로 세월 보내시다 굳건히 딛고 일어서셔서 우리 5남매를 훌륭히 키워 주셨다. 아버지를 잃은 다음해인 1967년 5월 3일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가슴으로 삭히시어 눈물 한방울도 흘리시지 못한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내 나이 겨우 12세에 사랑하는 네식구를 잃은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부유하지는 않고 늘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너그럽고 자상하신 아버지와 할머니 언제나 우리를 훈훈하게 대해 주시던 어린시절 내 모습속의 증조 할아버지와 함께 말이다. 여러 가족이 모여 행복하게 살아온 나로서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잃고 자식들의 학업 때문에 문산과 서울에서 양쪽 살림을 하시는 어머니와 1년 정도의 기간을 떨어져서 큰 언니와 살아야 했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러야만 했으므로 내가 중간에 전학을 한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셨고 혼자 직장생활 하는 큰 언니를 두고는 어머니가 마음이 안놓이신 탓이었으리라….
아버지와 할머니를 동시에 잃고 형제마저 공부 때문에 서울로 다 떠나고 난 외로운 집에 밤이면 천장을 뚫는 쥐소리에 울고 어머니가 그리워 울고 아버지가 그립고 할머니와 형제가 그리워 거의 8개월을 밤마다 울며 살았다. 큰 언니가 늦게오는 날은 서러워서 모두가 떠난 안방에서 소리놓아 울었다. 『엄마! 무서워 보고 싶어 외로워!』같은 집에서 담임 선생님께서 살고 계셨지만 갑자기 닥쳐온 외로움은 어린 내겐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러던 중 세월이 흘러 6학년을 지나고 나는 서울에 있는 여중에 입학하게 되어 그리던 어머니와 형제곁에 모여 살게 되었다. 비록 이모님댁 방 하나에 세들어 엄마, 작은 언니, 작은 오빠, 나 이렇게 네식구가 살았지만 그래도 난 너무 좋았다. 큰집에 외롭게 지내던 것과 비할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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