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이맘때의 일입니다. 푸르름이 남실대는 느티나무 길이 하도 좋아 30분 거리를 걸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미사 시간 10여 분 전에 도착했건만 사람들이 몹시 붐볐습니다. 첫영성체가 있는 날이었지요. 하얀 옷에 화환까지 쓰고 예쁘게 앉아있는 여자 어린이들. 그리고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의젓이 앉아있는 남자 어린이들. 천사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동안 새벽미사 때마다 어린이들이 가득 와 있어 궁금했더니 한 달 동안 첫영성체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어요.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부모 또한 얼마나 수고가 많았을까요. 지지배배. 아이들은 계속 떠들었습니다. 마침내 입당성가가 시작되고 신부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웅얼웅얼 떠듭니다. 고맙게도 200여 명의 어린이가 첫영성체를 한다니 쉽게 조용해질 리가 없지요.
신부님이 어린이들의 주의를 지혜롭게 집중시키십니다.
“여러분, 오늘 무슨 날이지요?”
“첫영성체 하는 날이요!”
큰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신부님은 대답할 틈도 안 주시고 자문자답을 하십니다.
“성체 모시는 날이지요? 성체는 어디서 만들어 지나요? 미사를 통해서 만들어 지지요? 미사에는 누가 오시나요? 예수님이 오시지요? 그럼 여러분 떠들고 장난해도 되겠어요? 예수님 오시는데 조용히 기다려야겠지요?”
신부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어린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점점 잦아들었습니다. 예식이 진행되고, 드디어 성찬예절 때 신부님이 커다란 성체를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 순간, 다소 잠잠했던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와…와…와!”
예수님은 그렇게 크신 분으로 오셨고, 아이들은 놀라서 탄성을 질러댔습니다. 그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러는 아이들을 무례하다고 나무라진 않으셨겠지요?
저는 갑자기 1964년 영세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흰 치마, 흰 저고리, 흰 면사포 속에서 눈부시게 깨끗해진 영혼으로 성체를 모시며 얼마나 뜨겁게 울었던가. 6개월간 준비하며 기다려온 주님과의 만남이 하도 기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고….
이어서 우리 아이들의 첫영성체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딸들은 하얀 원피스에 화환을 썼고, 아들은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맸었지요. 아, 천사 같던 그 모습! 갑자기 그 시절의 순수함이 그리워 눈물이 났습니다.
수십 년을 거슬러 행복에 젖어 있는데, ‘주님의 기도’문 찬미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들이 어찌나 또랑또랑 야무지게 소리를 내는지 실내를 가득 채웠습니다. 밝고 힘차고 생기가 펄펄 넘치는 그 소리!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 소리에 겹쳐 갑자기 온 실내가 초록빛으로 변하면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어요. 하늘에서 보송보송 쏟아져 내려오는 초록빛 축복! 신부님의 초록빛 제의가 그 언제보다 빛나 보였습니다.
잠시 후 신부님은 정성껏 성혈에 적신 성체를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들 또한 좀 전의 개구쟁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경건한 모습으로 공손히 받아 모시고 들어옵니다. 그날, 저는 간절히 기도 드렸지요.
‘주님, 저 풋풋한 어린이들은 우리 교회의 희망입니다. 꿈나무입니다. 저들 모두에게, 그리고 수고하신 가족들 한 분 한 분에게 초록빛 축복 듬뿍 내려 주세요.’
오늘, 이 푸르름 속에서 그날의 환상을 떠올리며 다시 기도 드립니다.
‘주님, 가톨릭신문 구독자 한 분 한 분에게 초록빛 축복 듬뿍 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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