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니카 씨에게서 택배 한 상자를 받았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초록빛 싱그러운 오이가 크기 따라 골고루 나왔습니다. 바로 고맙다고 전화를 했더니 큰 것은 생으로 먹고, 중간 것은 오이지를 담그고, 새끼오이는 피클을 담그라고 일러 줍니다. 감사, 감사!
평택에서 오이 농장을 하고 있는 모니카 씨는 제 글의 독자로서 알게 된 분입니다. 작년 요맘때 간곡한 초청을 받고 농장 구경을 잘 하고 왔지요.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오이나무들이 줄 맞춰 서서 상큼한 초록빛을 쏘아댔습니다. 농장의 너비며 길이가 상상을 초월해 푸른 숲 속에 든 듯, 탄성이 절로 났습니다. 2,000평이 넘는다는데, 스티로폼 상자에 담긴 펄라이트 돌가루에서 물을 먹고 자라는 수경오이라고 합니다. 농약을 안 한 거라며 따 주기에 모처럼 제 밭에서 신선하고 달콤한 오이 맛도 즐겼지요.
여기저기 외국인 노동자들이 보였습니다. 꽃을 솎아내는 사람, 자디잔 오이를 따내는 사람, 잘 자란 오이를 따는 사람…. 꽃을 솎는 이유는 알겠는데, 어린 오이를 따 버리는 게 궁금해 물었더니, 조금씩 비틀려 있어 상품 가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문득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돌아온 뒤, 자꾸 모니카 씨 생각을 했지요. 젊은 시절 직장 생활을 했던 그네는 글씨도 잘 쓰고 유식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신앙심이 대단했습니다. 그 바쁜 농사일에도 불구하고 금요일마다 철야 기도에 참석하고, 사제나 수도자들에게 잡수실 것을 마련해 드리고, 곳곳에 후원금까지 내는 분이거든요. 게다가 90살 넘은 시부모님 봉양까지 하고 있어 눈코 뜰 새 없는데, 틈틈이 독서를 하고 있으니 감탄을 넘어 존경스러울밖에요. 다행히 젊은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일하고 있어 마음 든든했습니다. 어쨌거나 열심히 사는 그들 모자의 모습이 아름다워 자꾸만 화살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 모니카 자매의 가정에 축복 많이 주셔요!’
곁들여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자꾸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사실은 제게 숙제 하나가 있었어요. 좋은 날 쓰리라 아껴둔 그릇들, 남아도는 이부자리들, 그걸 어떻게 처리할까가 문제였지요. 성당 바자회 때면 쓰지 않는 물건들을 부지런히 날랐지만 이부자리는 아무데서도 받지 않아 난처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들여다 본 노동자들 부엌살림이며 이부자리가 궁색해 보였거든요. 용기를 내어 모니카 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 환영이랍니다. 얼마나 기뻤는지요.
바로 준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한 번도 안 쓴 그릇이지만 웬 먼지가 그리 묻어 있는지, 다 씻어 닦고 종이로 싸서 상자에 담고, 베개며 이부자리들도 다시 점검하고, 종일 바빴습니다. 이튿날 용달차 회사에 이것저것 알아보고 모니카 씨에게 연락을 했지요. 정확한 주소와 받기 좋은 시간을 알려 달라고. 그러자 마침 아들이 서울 나가는 길이 있다고 함께 와서 실어갔습니다.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네며…. 사실은 숙제도 마치고 5만원이라는 운반비도 벌었으니 제가 더욱 감사, 감사!
그런 모니카 씨에게서 오이 상자가 택배로 온 것입니다. 그릇이며 이불이 하도 고마워 오이라도 보낸다고. 그날 담근 오이지며 피클을 꺼내보니 아주 맛있게 익었습니다. 경비 아저씨에게, 가까운 이웃에게 기쁘게 나누면서 저는 또 기도합니다.
‘주님, 남아도는 물건들, 제 자리를 찾아가도록 연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니카 자매를 비롯해 우리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축복 듬뿍 주셔요.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구직자들에게 하루 속히 필요한 곳에 불리어 소중히 쓰일 수 있도록 초록빛 축복 듬뿍 내려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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