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번이랬다. 처음의 감동과 울림은 반복될수록 줄어드는게 일반적이다. 아닌 경우도 있다. 미술감상이나 음악감상이 그렇다. 들으면 들을수록, 보면 볼수록 새로운 감흥이 일고,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모양이다.
상대성이론의 창시자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내게 죽음이란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 이상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범인(凡人)이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지난달 이스라엘-이집트-로마(아시시)를 순례하고 왔다. 늘 혼자이던 것이 이번엔 아내를 동반한, 그야말로 결혼 20년만의 호사였다. 순례코스로 이곳을 택한 것은 아내 때문이다. 필자는 수차례 같은 곳을 다녀보았지만, 아내는 늘 맘으로만 꿈꾸었던 곳이다. 성모님 발현지 순례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접은 것도 그 때문이다.
경험자의 여유를 부리며 너스레를 떠는 내게 아내로부터 과업이 주어졌다. ‘당신은 여러 차례 가봤으니 못 가본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록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해 사진첩 만들고 동영상 편집해서 교육용으로 유용하게 만들라는 명령이었다.
가본 이들은 아시겠지만, 성지순례 가서 사진 찍는데 열심인 사람치고 순례 제대로 하는 경우 별로 없다. 난 단지 갔던 곳 몇 번 더 갔었다는 이유로, 작심하고 순례할 기회조차 박탈당한채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성지순례, 그것도 이스라엘·로마 정도 되면 몇 번을 가도 그 감동이 어디 가겠는가.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시의 다미아노 경당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 앞에서 느꼈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번엔 과거에 가보지 못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가와 기념성당까지 둘러봤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박해를 피해 숨어든 지하 동굴교회인 카타콤바에선 순례의 기쁨과 행복감도 잠시 접고 옷깃을 여몄다. 지난번 순례땐 바로 그 장소에서 미사를 드리며 순례단 모두가 눈물을 흘렸었다.
아내는 연방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성지 구경(?)에 여념이 없다. 가이드 설명 받아적으랴, 그 짧은 순간에 기도하랴, 내가 못다한 촬영 도우랴 아내도 따가운 날씨에 땀 꽤나 흘렸다. 신기한 듯 경외스런 표정으로 성지를 둘러보는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난 저절로 기도가 되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날 밤, 그리고 귀국행 비행기에서 아내가 물었다. 순례를 마친 소감이 어떠냐고. 아마도 초행길인 자신의 감회도 감회지만 여러번 같은 순례를 한 내 얘기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난 자신있게 말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수차례 같은 곳을 순례한 이제야 정리가 되는 것 같다”고. 사실 그랬다. 사진으로만 남아있을 뿐 희미해진 기억들이 이제야 또렷이 기억되고, 이 기억은 아마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매 순간 감동의 연속이었지만, 벌써 기억이 희미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함께 다짐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의 흔적과 체취를 느끼고 온 ‘순례자 답게’ 살자고. 예수님처럼 더 인내하고 더 가난해지고 더 거룩해지자고.
물론 믿는 이들에게 성지(聖地)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바로 그곳이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랑의 가르침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하느님의 구원역사와 예수님의 자취를 체험할 수 있는 순례의 감흥은 신앙을 살찌우는 소중한 자양분임이 분명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