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21년 태어나 1861년 선종한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다.
1836년 신학생으로 추천돼 마카오로 향했으며 필리핀과 중국을 전전하며 수학하다 1949년 사제품을 받고 어렵게 귀국했다. 매년 7000리 길을 다니면서 사목활동을 펼쳤고 마침내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쳐 1861년 지상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그가 조국 땅에서 사목한 기간은 11년 6개월 정도가 된다.
최양업 신부가 사목한 11년 6개월의 시대적 배경은 1846년 병오박해 이후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비교적 박해가 잠잠하던 시기였다. 그는 왕성한 활동으로 지상과제였던 조국의 복음화에 전력할 수 있었고 가시적인 성과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음으로 양으로 한국교회의 초석을 다지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음에 분명할 것이다.
단순한 산술적인 비교는 무리가 따를지 모르겠지만 최양업 신부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성 김대건 신부의 그것보다 부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김대건 신부의 사목 기간은 부제로 입국한 시기까지 합쳐 채 2년이 못되지 않는다. 단지 첫째(사제)가 아니라는, 그리고 순교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미에서 4월 17일 청주교구 배티순교성지와 가톨릭대학교가 공동으로 주관한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 」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생애부터 시작해 선교활동의 의미와 배경, 서한에 대한 교의신학적 고찰, 영성 등 최양업 신부의 「모든 것」을 다가적으로 조명해보는 자리였다.
심포지엄의 초점은 최양업 신부의 「영웅적인 덕행」을 드러내는데 모아졌다. 귀국전 요동에서 중국신자들을 사목하면서 북방선교의 장을 열었고, 서한을 통해 탁월한 신심과 민중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으며, 국내외 정서와 교회 움직임에 대한 이해가 밝았고, 천주가사를 지어 교리 토착화에 크게 기여한 점 등등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덕행」은 아닐 심포지엄이 끝날 때까지 끝이 없었다.
「영웅적인 덕행」은 순교사실과 함께 시복시성의 요건에 해당된다. 우리는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최양업 신부가 시복시성 대상자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숨겨진 덕행과 기적을 찾아내고 행적이나 사적지 그리고 영성 연구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기도가 따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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