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활에서 말이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가끔 느낀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아무도 혼자 살지 못한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항상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생활한다. 우리의 신앙심과 사랑도 대화를 통하여 상징으로 대화가 필요하며 서로 존중하고 화목하게 살도록 권장했다.
그런데 성장 과정과 개성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같이 살다보면 때로는 의견 충돌이나 불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견 충돌이나 불화가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대화를 통하여 의견을 조정하고 불화를 해소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낟.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대화의 불통(不通)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불신과 오해가 생기며 서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므로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진다. 웬만한 불화는 대화로써 해결된다.
우리는 가끔 화를 낸다. 우리가 내는 화중에서 87%가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긴다. 그중에서도 다른 사람이 말을 섭섭하게 하여 화를 내는 경우가 가장 많다. 우리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대화할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우리의 판단 기준대로 상대방이 응해주도록 강요할 권리가 없다.
대화에서 겸손이 필요
개성이 너무 강한 사람은 자기 생각을 중요시한 나머지 자기 주장을 반대하는 사람을 적대시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도 받아주고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대화의 첫걸음은 우선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도 우선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존중하는데서 출발한다. 상대방이 내 생각과 틀린다고 해서 화를 낼 필요는 없다. 우리의 얼굴 모양이 모두 다른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대화에서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은 인간 사회와 하느님 대전에도 필요하다. 겸손이란 무조건 자기를 낮추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비굴이다. 진정한 겸손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실 그대로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가 대화할 때 상대방을 하느님과 관련시켜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 자신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헌차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들이다. 설혹 당장은 신자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미신자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필요하게 생각하시는 귀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 가운데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루가 10,27)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실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을 돕다가 천사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웃을 무시하다가 천사를 무시하는 경우가 된다. 우리는 천사보다 더 귀한 존재들이다.
우리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반대하거나 비평하고 음해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자세로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한다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신자들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상대방에 대한 섭섭한 생각이나 감정이 있을 때에는 부드러운 대화로 자기의 생각을 표시하고 대화로 풀어야 한다. 대화로 풀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대화에서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해란 영어로 ‘understand’인데 under란 밑이란 뜻이고 stand란 선다는 뜻이다. 상대방 위에서 군림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강압적인 자세가 아니라 상대방 밑에 서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는 자세이다.
아무리 서로 의견이 틀리고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자기를 이해하는 따뜻한 말로써 대하는 데 어떻게 자기 의견 주장만 하겠는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는가.
얼마 전에 우리 대학교에서 나의 핵심 참모 두 사람이 심한 의견 차이와 갈등을 느끼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한적이 있었다. 이분들은 모두 아이디어가 뛰어나고 열성적인분들인데 개성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중재하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고 너무 약하면 휘므로 너무 강하지도 않는 중용의 도가 좋을 것이다. 어떤 모임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판을 치는 모습은 하루 속히 사라지고 진지한 대화로 진행되는 민주적인 모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다원화된 사회 안에서 각자의 의견과 개성을 존중하면서 대화를 통해 서로 일치하고 화목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주님, 참다운 대화로 서로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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