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월’이면 애잔하게 떠오르는 청년이 있습니다. 공깃돌 송해붕 세례자요한 선생입니다. 그는 1926년 인천 계양에서 태어나 신심 깊은 어머님 슬하에서 하느님께 퐁당 빠져 살다가 1944년 인천 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하고 함남 덕원신학교로 편입합니다. 신학생이 된 게 너무 기뻐 남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식사 시간에는 배고파하는 동창들을 위해 자신의 밥을 덜어주거나 단식을 하고, 그 시간에 성인전을 읽으며 영적 행복을 누립니다. 겨울 방학 중에는 등 따시고 배부르면 나태해진다고 영하의 추위 속에 몇 십 리를 걸어 다니며 인천 지방 곳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러나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신학교는 폐교되고, 그는 고향에 돌아와 국민계몽운동에 나섭니다. 배움 없이는 나라 사랑도 하느님 사랑도 불가능하다며, 진학 못한 청소년을 마을회관에 모아 중등 교과목을 가르치고, 사이사이 천주교 교리를 가르칩니다. 잘 아는 곡조에 스스로 작사한 교리를 붙여 신나게 노래로 부르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전교하겠다는 일념으로 스무 살 청춘을 불태웁니다. 학생들은 저녁마다 몰려듭니다. 낮으로 논밭에서 수고한 그들이지만, 선생의 말씀이 하도 좋아 밤 11시까지 즐겁게 공부합니다. 선생은 그들에게 “나는 공깃돌이다. 편히 갖고 놀다가 버려도 좋다”며 눈높이를 맞추고, 차츰 지평을 넓혀 고촌, 고잔리, 누산리….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그런데 그 행복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9?28 수복이 되면서 그는 어이없게도 빨갱이로 몰려 가족도 모르게 총살을 당합니다. 타 지역에 들어와 동네 청년들을 마력으로 휘어잡는 그를 못 마땅히 여겼던 고촌 사람들이 그를 공산당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필귀정! 뒤늦게나마 가족들은 재판을 걸어 누명을 벗기고 그가 묻힌 곳을 찾게 됩니다. 가족과 제자들이 몰려가 피고들이 일러준 천등고개 산마루를 팝니다. 냄새가 진동하는 수십여 구의 시체들 속에서 다행히 검은 신학생 복을 입은 선생의 시체를 쉽게 찾았습니다. 바지 주머니에서는 묵주가 나왔고, 웃옷 주머니에서는 피가 잔뜩 묻은 소화 테레사의 상본이 나왔지요. 평소 성녀가 완덕을 이룬 24세를 그렇게도 부러워하더니! 그뿐인가요. 수업 중에 시계가 ‘땡’ 하고 치면 두 손을 모으고 “저도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세례자요한처럼 목을 베소서”라고 매시간 묵상기도를 하더니!
선생은 소원대로 스물 넷 푸른 나이에 순교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선 이 청년을 오묘한 방법으로 50년 만에 되살려 주셨지요. 1999년 고촌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차동엽 신부님은 노인들로부터 그곳이 공깃돌 선생이 일군 신앙 공동체임을 듣게 됩니다. 얼마 뒤, 신부님은 누산리에 ‘미래사목연구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또 동네 노인으로부터 바로 그곳이 공깃돌 선생이 강의하던 곳임을 듣게 됩니다. 두 번씩이나 그를 만나 놀란 신부님은 본격적으로 유족을 수소문했지요. 마침내 여동생을 찾아 고이 간직해온 자료를 얻어 살펴보니 과연 성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 신부님이 연구소 건물을 늘리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구입한 땅이 바로 선생의 순교터 천등고개였습니다. 이 세 번째 만남으로 신부님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다며 저에게 선생의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자료를 읽은 저 역시 선생의 삶에 매료돼 단걸음에 전기 ‘스물 넷 못다 사른 불꽃’을 엮었고, 그 후 몰려온 제자들의 증언을 들어 ‘영원한 청년’을 엮었지요.
오묘하게 산 이와 죽은 이까지도 맺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주님! 청년 송해붕을 꼭 성인 반열에 올려 주시고, 불타는 열정으로 뛰고 있는 그의 후예들에게 초록빛 축복 듬뿍 내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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