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때 음식이라도 남길 경우 식량난을 겪는 북한 형제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몹시 괴로워한다.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곱고 싶지만 국민 여론이 너무 부정적이어서 대북 지원 추진에 애를 먹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최근 외국언론과의 회견에서 털어놓은 고백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9월 13일자에 보도된 이 회견에서 김대통령은 자신의 남은 임기 3년 반 안에 통일이 이뤄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논여겨 볼 대목은 「국민 여론이 너무 부정적이어서」이다. 북녘 동포들의 굶주림을 덜어주려는 대통령의 생각에 대해 남녘에 사는 국민들이 도무지 좋지 않게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돕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서 돕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8·15 경축사를 통해 김대통령은 재벌 개혁의 의지와 국가보안법 개정 방침을 밝혔다가 야당으로부터 「이념적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른바 색깔 시비와의 재회다.
정치적 경쟁자에게 이념문제의 고리를 걸어 짐짓 공세를 취하거나 음해하는 수법은, 비록 낡고 비열할 망정 우리 정치현실에서는 유효한 수단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공격자의 비열함보다는 공격 받은 자의 상처가 언제나 치명적이었던 것이 이제까지의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이력에는 우리 사회 색깔 콤플렉스의 역사가 곳곳게 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음해와 편견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침몰하고, 떠오르고, 살아남은 끈질긴 정치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하고 있는 대북포용정책은 오랜 냉전 사고의 틀에 안주해온 사람들에게는 그 「햇볕」이 처음부터 못마땅하다.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폭동이 일어나고 체제가 무너져 「공짜」로 통일이 될 때를 기다릴 것이지, 식량원조며 「햇볕」이다 무슨 짓이냐! 식량을 주면 곧바로 군량미가 될텐데 그런 이적행위가 또 어디있냐! 금강산 관광으로 「엄청나게 많은 달러를 준 것이 미사일로 변해 우리의 심장을 겨누는 결과가 된 것을 왜 모른단 말이냐!」
이렇듯 「국민 여론이 너무 부정적이어서」김대통령은 대북 지원정책을 추진하기가 힘들다고 고백한 것이다. 당장 죽어가는 북녘 동포의 고통을 보면서도 「국민 여론」때문에 그들을 더 돕는 일은 못하겠노라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두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그토록 완강하다고 하는 「국민 여론」의 실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국민 여론」이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일찌감치 국민 설득을 포기한 긋이 들릴 수 있는 김대통령의 회견 분위기이다.
정치는 국민 여론을 거스르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법무장관 부인이 관련된 옷로비 의혹의 보도를 처음 「마녀사냥식」이라고 매도했다가 결국 국민에게 사과한 것이 좋은 예다. 여론을 거슬렸던 것이다.
그러나 국민 여론이 언제나 「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북녘 동포의 굶주림을 돕자는 것은 당장의 여론에서 어떻게 반응되든 간에 명백한 인도(人道)다.
모든 정치적 함의를 떠나서 의(義)다. 정치인, 그중에서도 큰 정치인은 이 의로움 하나만을 의지해서 여론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당당하게 국민을 설득해서 의로운 길, 인도로 이끌어 내야 한다. 김대통령은 「여론이 너무 부정적이어서」움츠릴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여론으로 바꿔나가도록 설득할 줄 아는 큰 정치인이어야 한다.
최근, 탄생 100주년을 즈음한 장면 선생의 정치적 역사적 복권 작업에서, 결정적으로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낸 김대통령의 특별한 몫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의로운 일에 앞장서는 설득자로서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대통령의 직무는 없다. 그런 점에서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한 과감한 결단 역시 김대통령에게 맡겨진 소명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부정적인 여론」을 설득하고 극복할 능력이, 그럴 여건이 충분하다. 우선은 그것이 공의(公義)이기 때문이다.
군사통치의 억압 아래서 희생되어간 무수한 의문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도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할 작업이다. 민주화제단에 피흘린 넋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무할 책무도 김대통령에게 있다. 경제위기에서의 탈출이 너무나도 급박한 현실적 과제이기에 다른 일을 둘러볼 겨를이 없었으나, 이제는 공의와 인도에 확실하게 눈을 돌릴 때다. 지금 한 천주교 묘지에 누운지 4반세기에 이르는 장준하 선생의 억울한 애국혼도 빛나게 일으켜 세워야 할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
♣바로잡습니다
본보 9월 12일자 5면 「방주의 창」 원고 중 끝에서 두번째 단락 「…의로운 일에 앞장 서는 설득자로서 역할보다 더 중요한 (대통령의 직무는 없다. 그런 점에서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한 과감한 결단 역시 김) 대통령에게 맡겨진 소명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에서 괄호부분이 누락되었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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