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가 이삿짐을 지고 마을 밖으로 떠나려고 했다. 이를 보고 비둘기가 『어디로 가려느냐?』고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내 울음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사가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부엉이가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비둘기가 딱하다는 듯이 타일렀다. 『그렇다면, 자네 울음소리부터 고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동쪽 마을로 이사간다 해도 또 다시 떠나게 될 날이 올 것이네』
전교의 달 길목에 생각나는 교훈이다. 이로운 것 하나를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해롭다고 알고 잇는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전교의 달이 오면 새삼스러울 정도로 전교는 교회의 본질이요 목표이며 사명이라고 외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덤덤하게 그냥 지내는 듯이 보일 때가 많다.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기온의 변화엔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속성 그 자체인 전교의 당위성은 그토록 절실하게 와 닿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고 싶다.
전교에 대한 열정이나 사명감이 희박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 믿음의 족보에서 내 자신이 주인이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기 자신이 하느님 집안이라는 소속감. 하느님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자긍심을 삶 속에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기쁘고도 보람된 하느님 체험을 갖지 못했거나 적어도 신앙을 가문의 자랑으로 내세울 줄 모른다. 스스로 감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조상 공경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민족이지만 내 생명의 출처요 뿌리인 하느님 집안의 자녀요 상속자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는 일에는 이상할 정도로 소홀히 하고 있다.
왜 그런가? 신앙체험 특히 기쁨의 체험이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답답한 일이나 어려운 정진적,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한 보람을 맛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신앙 생활의 보람을, 기쁨을 말할 수 있겠는가.
결혼한 지 몇 해가 지나고 찾아온 어느 자매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난다. 그 자매는 결혼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 중심, 아이 중심으로 무게 중심이 서서히 달라지더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으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웃을 대하는 내 마음의 중심 축이 바뀌고 이제는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 한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집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욕은 다 참아도 자기 부모에 대한 욕은 못 참는 게 우리다. 부부싸움을 할 때에도 상대방을 헐뜯는 것은 그래도 참지만 만일 『당신 부모님은 왜 그래? 원래 그런 집이었구나』하는 식으로 상대방 집안에 대한 비방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싸움은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누군가 마구 부를 때 열받아 본적이 있는가. 또 우리가 어떤 서약을 할 때에 『이것을 어기면 내 성(性)을 갈겠다』고 하는 것도 아버지를 비롯해 혈통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리스도 안에 한 핏줄이요 한 솥 밥을 나눈다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또 하나는 우리 교회 안에 「서비스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복음의 근본인 「섬김정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전교의 중요성 못지 않게 냉담자 문제를 걱정하는 이가 많지만 냉담자 증가 현상은 「애프터서비스 정신」의 부재가 낳은 당연한 귀결로 봐야 할 것이다. 사람을 수영장에 집어넣고 알아서 수영을 배우겠지 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음식점에 가보면 식당 주인이 있고 없고에 따라 서비스나 친절 정도가 눈에 띄게 다르다. 누가 주인이고 종업원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그 사람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주인이 아닐 것 같은데 친절하게 나오면 십중팔구 그 사람은 주인의 가족이나 친척이라고 믿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물론 종업원이 다 불친절하다는 뜻은 아니다. 「주인의식」을 잊어버릴 때 본인도 모르는 사이 머슴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누군가 어느 회사원에게 물었다. 『이 일을 왜 합니까?』『원래 해오던 일입니다』『관행에 의해서 합니다』『규정에 따라서 합니다』요즘같이 탄력적인 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대답들이다. 마찬가지로 『전교를 왜 합니까?』묻는다면 『본당 신부님이 아무나 한 사람 데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활동보고를 하기 위해서요』『그 사람이 우리가게 거래선이기 때문입니다』하지는 말자. 그냥 「잘 살아 보세」만 했지 「왜 잘 살아야 하는지」모르고 뛰는 것처럼 전교의 중요성만 강조했지 「왜 전교를 해야하는지」근본 동기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바로 이 집안의 주인임을 깨닫고 그분의 자식된 도리와 본분을 다할 때 무식한 상속자, 무능한 2세라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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