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핑계 삼아 한 번씩 제주에 다녀오는 것이 내가 누리는 호사가 된지 꽤 오래 됐다. 제주에 갈 때마다 내가 들르는 곳은 표선 바다다. 바다 앞에 서면 마음 안에 담겨 있던 것을 다 게워낼 듯이 숨을 힘껏 내쉰다. 그러고 나서 숨을 깊이 들이쉬며 그 자리에 바다를 채운다. 그러면 숨을 제대로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기운이 충전된 것 같아 속이 든든하다. 부산여자라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이번 여행은 임현자 화백의 전시회와 이생진 시인의 시낭송이 곁들여진 음악회에 참석하는 것이 주된 일정이었다. 리무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카페에 들러 제주의 오름과 바다가 담긴 그림들을 보고, 이중섭 미술관 뜰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음악회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온 원어민 강사 캐롤린이 시낭송을 할 차례라고 한다. ‘저 섬에서/한 달만 살자/…… 그리운 것이/없어질 때까지/뜬 눈으로 살자’ 이생진 시인의 ‘무명도’라는 시다.
외국인이 서툰 발음으로 우리 시를 암송하는 것을 들으니,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감동이 인다. 사람 마음은 다 같은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앵콜! 앵콜!’ 이런, 시낭송에 앙코르라니! 캐롤린이 뒤이어 ‘목포의 눈물’을 구성지게 부르자 휘파람 소리와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몇 곡의 음악 연주가 끝나고, 마무리로 이생진 시인이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 수록된 몇 편의 시를 암송했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떨림이 인다.
이처럼 시가 갖고 있는 힘이 놀랍다. 노벨 문학상 발표 후, 한글로 쓴 시가 번역의 장벽을 넘기 어려운 것이 문제라는 얘기가 뉴스에 심심찮게 나온 터라 오늘의 감동은 더욱 남달랐다.
일정 때문에 바다에 들렀다오지 못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당분간 캐롤린의 시낭송을 떠올리면 미소가 절로 지어질 것 같다. 어쩌면 시란, 말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닿으면 언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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