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다고 할까, 역겹다고 할까, 그 어느쪽이든, 희한한 장면이 틀림없다.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 중인 국회 재경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날의 쟁점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그의 아들 이재용씨를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불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 이건희 회장일가는 편법적인 증여를 통한 탈세와 부당내부거래 의혹을 받고 있는 당사자다.
재경위의 여야의원들은 이회장 부자의 증인채택을 둘러싸고 토론을 벌인 뒤 표결에 나섰다. 그런데 이 표결 방법이 기발했던 것이다. 「무기명 비밀투표」였다. 결과는 찬성이 5표, 반대가 19표. 이회장 부자 증인 채택안은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전무후무한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한 부결에는 여도 야도 따로 없었다는 것이 현장을 지켜본 기자들의 보도다.
전무후무한 무기명 비밀투표
증인채택안은 재경위에서 부결되었으나, 이건희 회장 일가의 「그룹상속」은 이튿날 국회 정무위원회의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정무위 소속 의원들은 이회장 일가가 그룹을 이회장에게서 아들인 이재용씨에게 표나지 않게 상속하기 위해 어떻게 치밀한 작업을 해왔는지, 95년에 그의 아버지에게서 60억여원을 증여받아 16억원만을 세금으로 냈던 20대 청년이 그 차액 40억여원으로 어떻게 수백배의 재산을 불려가게 되었는지, 그릭하여 어떤 과정으로 거대한 삼성그룹의 지배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추궁했다.
『부당하고 탈법적인 재벌 세습』행태를 비판하는 데는 여도 야도 따로 없었다. 전날 재경위에서 증인채택안이 부결된 모습과는 대조적인 분위기다.
이회장 부자의 상속과정에 대한 의혹은 사실 새삼스러울 것은 아니다. 몇몇 시민단체는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긴 부당내부거래나 탈세 목적의 편법 증여 등을 진작부터 고발해 왔다. 그러다가 삼성자동차 문제로 이회장이 삼성생명 주식을 내놓는다고 했을 때 삼성생명을 포함한 그룹의 사실상 지배권이 이미 아들에게 「세습」되어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당하고 적법한 절차를 거친다면 상속이든 증여든 나무랄 일이 못된다. 또 능력이 있는 2세라면 그가 경영에 참여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방법도 없다.
부도덕성이 근본 문제
다만 상장 직전의 그룹계열사 주식을 샀다가 상장 후 되팔아 불과 수개월 사이에 수백업원의 차익을 얻는 부당내부거래, 또는 그 부도덕성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태어나기를 재벌가의 장손으로였다고 하더라도 손끝 하나 까딱 않고 다시 재벌이 세습되는, 이런 사회구조적인 허점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 앞서는 근본 문제가 남는다. 부(富)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바로 근본문제의 중심이다. 또한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앞뒤 가림없이 날뛰는 재산에 대한 집착이 그것이다. 그런 것을 일러 「천민적(賤民的)」이라고 일찍이 이름붙인 학자도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천민자본주의의 가장 못된 행태의 포로가 되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재벌일가의 변칙상속이 보도되고 있는 신문의 한 구석에, 골프장에서 6천만원 짜리 시계와 2천만원짜리 다이아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어느 주부가 골프장 주인을 상태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작은 기사를 보게된다. 또한 98년도 한해동안 배우자나 자녀에게 10억원 이상을 증여하거나 상속한 사람이 전국에서 411명이나 되었다는 통계도 나와있다. 이 숫자는 97년도 보다 76%나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또 한쪽 구석에는 이런 기사도 있다.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을지로에서 종이가게를 하고 있는 사람이 그가 20년 걸려 가꿔온 경기도 가평의 농장을 서강대학교에 기증했다는 미담이다. 이 농장은 55억원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어떻게 쓰느냐고 중요
그러고 보면 우리 기억에는, 특히 대학에 재산을 기증하는 미담의 주인공들이 더러 남아있다. 흔치는 않지만, 평생 시장에서 젖갈을 팔아온 할머니라든가 혼자서 바느질품을 팔아 살아온 할머니 같은, 그 자신들도 전혀 넉넉치 않은 경우도,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눈물겹다. 돈은 어떻게 버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벌기 어려운 것이 돈이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던 앤드류 카네기는 자손에게 부를 세습하는 대신 사회에 재산을 모두 환원한 청부(淸富)의 상징이다. 선비정신의 덕복으로 청빈(淸貧)이 존경받아왔듯이 오늘 이 사회에서는 그같은 청부의 윤리가 높이 평가받는 시대여야 한다. 대학에 재산을 털어 기증하는 무명의 교육자선가들을 보면서, 자신이 쌓은 부를 어떤 방법으로라도 자식에게 그대로 「세습」하려고 애쓰는 재벌들은 생각을 고쳐먹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세습」은 빠져나갈 틈없는 제도로라도 막아야만 나라의 정신적 뼈대가 곧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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