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초시네 증손자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담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온 국민에게 가장 사랑 받는 단편소설, 「소나기」의 첫 구절입니다.
근래 들어 이름 있는 문인이 작고하면 그분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선양하는 뜻에서 생가 부근에 문학관을 세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해외여행 때마다 유명 문인들의 고향에 세워진 문학관을 방문하며 몹시 부러웠는데, 이제 우리나라에도 지방자치단체 덕분에 그런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등단시켜 주신 문학의 아버지 황순원 선생님은 고향이 이북이라 그 일이 불가능해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길이 열렸지요. 소설 「소나기」속에는, 소년이 살고 있는 시골로 서울에서 낙향한 소녀네가 곧 양평읍으로 이사를 간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그 ‘양평’이라는 지명 덕분에 양평군에서는 2006년, 선생님이 평생 몸담고 계시던 경희대학교와 손잡고 그곳에 ‘소나기 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뜻이 아름다웠기에 사업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1만6000평 부지를 구입해 경기도청과 문화체육관광부의 협조를 받으며 문학 테마 파크를 조성한 것입니다. 주변 자연 속에는 소나기 광장, 수숫단 오솔길, 너와 나만의 길, 고백의 길 등 선생님 소설 속에 나오는 장면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고, 800평 규모의 3층 건물 안에는 선생님의 삶과 문학을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실, 영상실 등을 고루 갖춘 국내 최고의 문학촌을 건설한 것입니다. 아니 해외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문학관을 본 일은 없습니다. 이곳에는 사랑을 노래하는 청춘들도 많이 오지만, 대체로 초?중등 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체험 학습을 하고 갑니다. 그리고 해마다 열리는 문학제를 통해 선생님의 향기를 전파하면서 국민 정서 순화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14일 이곳에서는 조촐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유족을 비롯해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문인, 제자, 독자들 100여명이 함께 모여 10주기 추모제를 치른 것입니다. 추모사, 추모시 낭독 등을 거쳐 아드님 황동규 선생의 감사 인사가 있었고, 뜻밖에도 95세의 사모님이 참석하셔서 식순에 없던 즉흥 인사를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창씨개명에다 조선어 말살 정책까지 펴고 있던 때라, 우리말로 글을 써서 어떻게 밥을 먹고 살겠느냐고, 친정 부모님들이 선생님과의 결혼을 반대했지요. 하지만 나는 문학을 좋아했고, 문학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최고의 명약이라고 생각했기에 우겨서 결혼을 했어요. 그 덕분에 오늘 이 영광을 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갈수록 세상이 험악해지는데 부디 문학을 장려해서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나라도 바로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전에도 저에게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들려 주셨지요.
“일제 때 일본어로 글을 쓰면 호강시켜 주마고 여기저기서 유혹이 있었지만 선생님은 끝내 거절하시고 국어로 글을 써서 몰래 서랍 속에 감추어 두셨지. 그리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셨지만, 해방 후 서울고등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으실 때, 영어가 아닌 국어를 가르치겠다고 고집하셨어. 교장 선생님이 영어 전공자가 어떻게 국어를 가르칠 수 있느냐고 묻자 ‘나는 소설 쓰는 사람이라 혼자서 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고 대답해서 뜻을 이루셨대. 경희대학에 가서도 국문과 교수로 봉직하셨지.”
뜻있는 분들이 이렇게 지켜온 우리 문학입니다. 아무리 영상 매체가 대세를 이루어도 부디 독서 인구가 많아져 국민 정서가 순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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