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얼마전 본당 설립 61주년을 기념해 본당 차원에서 실시하는 해미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본당 신자 280여 명을 실은 7대의 버스는 오전 8시 성당을 출발해 호남고속도로에 올랐다. 버스에 탄 신자들은 성가와 성지순례 기도를 시작했고, 묵주기도와 함께 도착시간까지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를 바쳤다.
기도를 하며 창밖을 보니 들녘에는 노랗게 익은 벼들이 바람에 살라 흔들리고 있었다. 또 어떤 논에서는 농부가 벼를 베고 있었다. 저 농부의 마음은 어떠할까. ‘여름 내내 땀 흘려 지은 농사를 수확하는 기쁨으로 고된 줄도 모를까. 아니면 점점 수입농산물 확대로 설 자리를 잃어가는 국산 농산물의 현실에 한숨 쉬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도로 주변에는 코스모스가 키 작은 들꽃들을 제치고 자기가 최고인양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해미성지에 11시 정각 도착한 우리는 해미성지 내 성당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전국에서 모인 1000여 명의 신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는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이어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듣다보니 3000여 명의 무고한 천주교 신자들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참수 당하거나 생매장 당했다는 생각에 치가 떨렸다. ‘그분들이 죽음으로 이룬 숭고한 뜻이 이제 해미순교성지에서 빛을 발하고 신자들은 그분들의 순교정신 때문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또 신부님은 한국 천주교는 서양문명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주님 뜻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천주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신앙을 키워갔다고 했다. 토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신랄하게 역설하신 신부님의 강론은 성당을 메운 신자들에게 큰 감동과 깨우침을 줬다.
미사가 끝난 후 성당 주변 정원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여숫골 생매장 순교성지에서부터 호야나무(감옥터) 인근, 진둠벙 등 성스러운 자리, 기념관에 전시된 순교자들의 유골과 치아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쳤다. ‘성’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분들의 거룩한 순교 정신이 내 가슴으로 뜨겁게 다가왔다.
해미성지는 원래 군사 요충지였다고 한다. 1417년 태종 17년부터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며 왜구들을 막아온 지역이라 했다. 1790~1870년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 이후부터 박해가 더욱 극심하여 이곳 해미감옥에서만 무려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뼈저린 순교자들의 아픔을 빠짐없이 둘러보고 오는 길을 재촉했다.
성당으로 돌아오는 버스, 신자들과 구수한 덕담과 함께 술 한 잔도 생각났지만, 오늘만큼은 순교자들을 향한 거룩한 뜻을 저버릴 수가 없어 참기로 했다. 성당에 도착하니 저녁 7시경.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무사히 귀교한 신자들은 본당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주임신부님의 폐회 기도로 해미성지순례를 마쳤다.
진둠범 앞에 세워진 성모님 시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여기 시문을 써본다.
오늘도 진둠벙에 옷깃 적셔 / 영혼들 끊임없는 구애로 / 머리 들 랄 없으시다. / 바람구름 흘러간 세월에 / 성안 호야나무 못 박혀 서서 / 살아 증거하니 / 가지마다 멍이 들어도 / 숨찬 나그네들 푸른 빛 그늘로 / 덮어 덮어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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