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와 연미사를 바치는 이유
유다의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할 하여 온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에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황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모든 죽은 이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마카 하 12,43~45 참조).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중략)』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루가 17,23~28 참조.)
두 편의 성서말씀을 볼 때 구원의 기도(연도)와 구원의 제사(연미사)는 물론 구원을 위한 그 어떤 기도나 희생제물을 죽은이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 천상의 교회(천당)와 지상교회, 정화의 교회(연옥)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교황님의 권한에 의하여 반포된 2000년 대희년 교황청 내사원(內赦院) 대사 규정안에서는 『희년 대사는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지상 순례중에 있는 신자들과 이미 지상 여정을 끝마친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일치시키는 결속을 발휘하는 초자연적 애덕의 두드러진 행위』(전대사 혹은 한대사, 연미사, 연도, 묵주의 기도, 희생 등)는 지상교회에 속한 이들의 몫이다(2000년 내사원 대사 규정 참조).
지상교회에 있는 신자들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들을 내포하는 『구약성서(마카하 12,43~46)와 신약성서(마태 6,12 요한 1서 3,20~22 : 5,16 : 2 디모 1,18 야고 5,16 등)를 볼 때 자비의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의 기도는 가납되고 확고한 구원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마태 18,19 이하 : 마르 11,24 : 요한 5,16 등) 고 믿어야 한다.
또한 『하느님은 당신의 고유한 최상의 방법으로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가 전해지는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신다』고 믿으며 확신해야 할 것이다.
장례미사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배려
장례미사는 고인에 대한 존경 표현
효도하는 후손들 마음 드러내기도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 친족과 친지들이 슬픔 속에서 장례를 준비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일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라 할 것이다. 고인과 조상에 대한 구원의 제사(장례미사 혹은 연미사)는 후손으로서 선조들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과 예의를 드러내는 외적인 표현으로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 고대로부터 어느 민족이나 이를 중시하며 실천해왔다.
조상을 위한 구원의 제사(장례미사)를 정성껏 지내야 하는 이유(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 영혼 불사불멸의 사상이다.
어떤 종교(무신론자들도 고인 앞에서 막연하지만 숙연한 마음으로 명복(冥福)을 빈다)든 관계없이 인간의 죽음은 죽음으로 모든 것에서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제2, 제3의 삶이 계속된다는 신앙을 오래 전부터 믿어 왔으며 또한 가르쳐 왔다.
둘째 : 참된 의미는 효(孝)에 있다.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십계명에 있어서 상 삼계 중 첫 번째는 「하느님을 흠숭하라!」요 하 칠계 중 첫 번째도 「부모에게 효도하라!」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본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요한 2,4b)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대한 효(순명(도심으로 행하(물이 포도주로 변함)시지 않았는가?
구원의 제사(장례미사 또는 연미사)는 조상님께 정성을 다하여 효도하는 후손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외적 표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효도의 정성이 깃들지 않는 장례미사는 무의미한 행위라고 감히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셋째 : 공동체 의식에 의미를 두고 있다.
여러 가족과 친척(후손)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믿는 사람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장례미사 때 만큼은 성당 뒤편에 앉을지언정 숙연하지 않는가?(혼인 미사 때에는 대체적으로 산만하고 시끄러움) 하관식 성수 예절 때 신자들과 행렬을 이루어 성수를 뿌리는 모습은 의미를 잘 모르면서도 때로는 신자들보다 더 진지하고 경건할 때가 많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한 두가지만 비교해 본다. 장례미사 때의 해설자와 성가단, 참석하는 신자들의 숫자를 굳이 의미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굳이 혼인성사(미사)와 비교할 이유는 없지만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의 마음 자세는 어떠한가? 혼인미사 때는 가급적 권고(권장)를 해서 꽃길도 준비하지만 장례미사 때는 어떠한가? 여러 면에서 쓸쓸함을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위로 받을까? 호상(好喪)이라고 말을 하면서…물로 한나절 시간이 걸리겠지만 하관식에 갈 시간이 그렇게도 없는가? 일부이기는 하나 호텔이나 뷔페식당, 잔치집에서는 이따금씩 사제나 수도자, 총회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묘지난이 심각하다는데
산 이 위한 사목적 배려 못지않게 죽은 영혼 위해서도 정성 모아야
가톨릭신문을 보면 거의 매주일 성전봉헌 소식을 들으며 기도 공동체(소공동체)의 흐뭇한 모습을 자주 본다.
얼마나 수고가 많았을까? 물론 보람이 더 컸겠지만…. 신자수가 5000명이 넘으면, 나아가 10,000명이 넘으면 사목이 불가능해지고 선구자적인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되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
수도권의 세 교구 관리국에 조심스럽게 문의를 해보니 살아있는 신자들을 위해서 모 교구는 99년 한해에 약 50여억원, 150여억원, 250여억원 어치의 성당터를 구입하느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총력」을 다하였다고 한다. 한 해에 성당터 마련에 천문학적인 정성을 모았다고 하면 성전 봉헌하는 데에는 얼마나 큰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지 담당하신 분들께 고개숙여 감사를 드린다.
살아있는 신자드을 위해, 또 미래 교회를 위해, 나아가 하느님 영광을 위해 우리 모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가? 모 교구에서는 「선교로 새 생명을!」외치며 전교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반갑고도 흐뭇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이들(亡人)을 위해서 물론 여러 사정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으나 오늘의 교회가 적어도 10년 내외에 얼마나 관심과 심혈을 기울였는가? 수도권에서는 공원묘지 허가가 나오지 않기에
…, (그동안 교회는 무엇을 했나?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나면 가능한데 거리가 멀어서?)
앞으로의 추세는 매장보다는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되지 않는가? 물론 선구자가 요처되는 시대이지만 과연 신문, 라디오, TV에 나와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일부 학자나 지식인, 경제인 그들은 누구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기득권층에 가까운 이들이 아닌가?(그만한 부모나 후겨인의 도움없이 기득권층에 속할 수 있는가? 선산이 있거나 아니면 묘지를 구입해 놓았거나 아니면 화장문화에 익숙한 종교인)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얼마나 다른 대안(화장 : 화장 후 강이나 바다, 산에 뿌림. 납골당 : 화장후 그릇에 담아 대부분 지하나 빌딩에 보관)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며 연구하였는가?
물론 앞으로 50년 또는 100년 미래를 내다보며 연구하는 노고에 감사를 드리지만 매장문화를 성급하게 유도내지 홍보하기 보다는 오늘의 문제를 한번 더 깊이 함께 생각하였으면 한다. 『나는 화장을 유언으로 남기겠지만 차마 부모님을 화장할 수 없다』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모그룹 회장도 화장을 하였다』그만 홍보하지 말고 화장 후 어떻게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는가? 왜 감추는가?
이 글은 교회 신문을 전제로 하기에 고인(故人)들을 위한 교회의 사목적 배려에 있어서도 살아있는 신자들 못지 않게 함께 고민하고 온 심혈을 기울여 뜻을 모으고 정성을 모으자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필자는 40여분을 모실 수 있는 가족 묘원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이들을 씀).
납골당·유해봉안소를 대안으로
매장방법 개선, 국토 효율적 이용을
뿌리깊은 매장문화…의견수렴부터
현재의 매장제도(방법)부터 조심스럽게 논의하고 싶다.
『국토가 묘지로!』깊은 생각 없이 이 말을 쉽게 하기보다는 매장방법을 개선하였으면 한다. 천주교 모 공원묘원에 가보았더니 실제로 두평도 안디는 매장제도를 권장하고 있었다. 가로 80x세로 210㎝, 간격은 30㎝, 앞으로 1m정도 공간, 비석은 없이 석판 위에 비문, 채 한평도 안되었다. 물론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문제점도 많겠으나 단숨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의식(문화)을 의도적으로 전환시키려는 일에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 아닌가?
지면의제약으로 아쉽지만 필자(수원교구 연령연합회 지도 신부, 공원묘지 전담)로서는 합법적 사고 보다는 합리적 사고에서 모든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자는 제언을 하며 좀 선구자적인 머리가 있다고, 기득권층에 있다고, 좀 배웠고 힘이 있다고 하여 생각이 모자라는 듯한 일을 학문적으로나 논리적으로 꿰맞추기 보다는 힘이 없고 가난하고, 기득권층과는 멀리 있기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이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해보며 위령성월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맞이하였으면 한다. 물론 폭넓은 대화를 나누며 연구해 보자는 말을 남기며….
흙의 문화, 매장문화에 익숙한 우리 민족이 아닌가? 좀더 심사숙고한 후 다른 대안을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아울러 「이 세상을 떠난 모든이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안함에 쉬게 하소서」…. 교우들만이 아니라 「모든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드리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또한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구하소서」를 다시 바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누가? 왜? 빼라고 했는가? 필자의 기억으로도 적어도 50년이 넘은 기도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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