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오가며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는 나무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봄에는 연둣빛 여린 잎과 꽃에게만 마음을 빼앗겼다. 여름엔 무성한 잎에 가려 무슨 나무인지,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뎌온 나무인지 분별이 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단풍 들고 잎이 질 이맘때쯤이면, 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황금들녘이 텅 비워지고, 기세 좋게 아름드리나무를 친친 감고 있던 한해살이 덩굴식물들 잎이 다 떨어지자,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떡갈나무와 플라타너스 넓은 잎사귀가 바람결에 뚝 떨어져 길 위를 구른다. 은행나무는 황금빛 잎사귀가 몇 남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은빛 줄기로, 벚나무는 결이 져 갈라진 껍질로, 느티나무는 양팔로 다 안을 수 없는 아름드리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을 향해 저마다 가지를 뻗고 말없는 말을 건넨다.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덜어내고 부끄럼 없이 꿋꿋한 나무가 성자와 같다. 느티나무 빈 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그동안 뭇 생명들을 품고 견뎌온 나무의 삶이 고스란히 내게도 느껴진다.
도시에 살 때는, 겨울이란 삭막한 무채색 시멘트 빛깔로 내게 여겨졌다. 그런데 시골에 내려와 살며 겨울 빛깔이 무채색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신록이 사라진 자리를 채워주는 나무와 흙의 절제된 갈색이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겨울채비를 갖춘 소나무 잎이 까칠하다. 잣나무 푸른 잎도 빛깔이 짙어졌다. 목련나무에 어느새 꽃송이가 벌써 맺혀 있다. 저렇게 꽃봉오리로 추위를 견뎌내어 이른 봄날 꽃을 피워내는 것이리라.
삶의 군더더기를 다 버리고, 견디며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신 말씀대로 이제 이 겨울을 견뎌내는 일만 남았다. 견뎌낸다는 것은 봄이 오리라는 것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는 희망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마음이 얼지 않도록 옷깃을 여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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