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밀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먹고 있는 밀이 어떤 밀인지조차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1991년 2월 가톨릭농민회 총회에서 사라진 우리밀을 살리기로 결의하고, 제가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준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밀에 관심을 갖고,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며, 그동안 미처 몰랐던 여러 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1식량인 쌀은 완전히 자급을 할 수 있는 수준인데 비하여, 제2식량인 밀은 부끄럽게도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전쟁이나, 환경재앙, 세계적 식량난이 닥칠 경우, 공급이 불안정하게 되어 가격이 몇 곱절이나 뛰게 되는 등, 식량 안보를 위협받게 딘다는 것이 그 첫째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수입밀은 봄에 씨앗을 뿌려 식탁에 오르기까지 생산, 저장, 운동, 가공 과정에서 무려 열 다섯가지나 되는 맹독성 농약이 사용되므로, 농약 잔류로 인해 소화가 잘 안되고, 속이 거북하며, 발암 물질이 검축되었다는 사실도 신문보도를 통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우리밀을 잘 살려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우리밀은 수입밀과 달리 겨울 작물이므로 농약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 땅이 비옥해지며, 그해에 나온 밀은 묵히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속이 편안하고 노화방지 기능 또한 탁월한 가장 건강한 식량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충남 이남은 벼를 베고 난 후, 빈 들판에 밀 씨앗을 뿌려 겨울 농사를 지을 수 있으므로 겨울 일거리가 없는 농민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 정부에서 밀 수매를 중지해 버린 뒤부터 밀은 거의 사라져 이미 종자가 될 씨앗조차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음이 다급했습니다.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그해 11월 28일 2000명의 발기인이 밑거름이 되어,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추기경님을 모시고,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를 발족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5년 동안 매주말마다 각 본당을 다니며 우리밀을 살려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처음 들어보는 우리밀에 관한 제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었으며, 함께 힘을 모아 밀을 살리자는 고마운 뜻으로 기꺼이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찰기도 없고 빛깔도 곱지 않은 우리밀을 먹으며 「우리밀 살리기 운동」에 나선 저희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고, 오히려 저희들에게 고마워했습니다.
처음으로 우리밀 제병이 가르멜 수녀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회원은 계속 늘어나 16만명이 되었고, 출자금은 무려 36억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밀 가공 공장이 다섯 군데 세워졌고, 빵, 국수, 제과, 라면, 고추장공장도 세워졌으며, 전국에서 우리밀 식당이 속속 문을 열었습니다. 밀 경작지도 늘어나 농민들은 서로 종자를 구하겠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우리밀 밟기」에 따라나온 어린이들은 온종일 겨울 하늘에 연을 날리며 맘껏 뛰어 놀았습니다. 삭막하기 짝이 없던 겨울 들판이 점차 푸르러졌습니다. 오뉴월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밀밭으로 소풍 나온 가족끼리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우리 밀 서리」를 하던 날은, 밀단을 불에 태워 밀알을 주워먹은 아이들의 까아만 입언저리가 하도 건장해 보여, 보는 사람마저 살맛이 났습니다.
밀밭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1992년, 처음으로 우리밀 생산량이 6000가마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함께 얼싸안고 기뻐했던 일은 잊을 수 가 없습니다. 1995년에는 30만 가마를 생산해 사람이 먹는 밀 자급율 1%를 달성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격려해주던 많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더욱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조금씩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밀은 상업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이 아니었으므로, 유통과정에서 소비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어렵기만 했습니다. 판매하는 곳은 한정이 되어 있었으며, 너나할 것 없이 우리밀의 좋은 점을 알고, 우리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입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우리밀에 선뜻 손이 내밀어지게 되지 않았습니다.
밀의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드디어 수매자금이 모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정부 돈을 꾸어 쓰기 시작했고, 이자는 조금씩 액수가 커졌습니다. 회원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먼곳까지 우리밀 제품을 찾아아 사는 등 애를 썼지만, 먹는 양이 경작량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밀을 소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원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시장을 개방했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에 생산되는 밀을 전량 소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정부의 자금에 더 이상 기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IMF는 더 큰 시련이었습니다. 생산된 밀은 창고에 가득 쌓여있는데, 우리밀을 찾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원금과 이자는 계속 더 늘어났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밀 출자금은 우리밀 살리기에 다 써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부와 농협에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순수한 뜻으로 모인 민단단체가 시작한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지켜달라며 애원했습니다. 고맙게도 농림부는 고심 끝에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의 모든 부채를 끌어안고 우리밀을 살리기로 약속했으며, 농협은 우리밀을 전량 수매하고, 경작지를 계속 늘려나갈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어려움을 무릅쓰며, 남다른 뜻가 희망으로 생산을 맡아왔던 공장들은 힘든 상황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엄청난 시련을 겪고, 후유증을 앓으며 일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가톨릭 농민회는 처음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던 때의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 맨손으로 새롭게 운동을 펼쳐 나갈 것을 결정했으며, 이제 저는 제가 소속된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하여 우리밀을 지켜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를 도와주신 전국 각 본당의 신부님들과 수도회, 우리밀 회원 여러분, 우리밀을 땀흘려 경작한 농민분들, 우리밀을 더 많이 소비시키기 위해 애쓰신 판매장에 계신 분들, 더 나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애쓰시다가, 지금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우리밀 공장 관계자 여러분들,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밀 소식을 낱낱이 보도해준 교회 언론 기관과, 농림부와 농협 관계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은 그 참된 가치를 위해, 우리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고 계속 해나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 세대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손들이 살아갈 먼 훗날을 위해, 지금 우리 가족의 밥상을 건강하게 살리는 이 작은 일부터 실천을 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밀은 살아났습니다. 파아랗게 움을 틔운 밀싹이 다시는 이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밀 싹을 가슴안에 품고, 온갖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고 아파하면서도 우리밀을 사랑해온 우리들의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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