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수도회에서 발간하는 잡지 「야곱의 우물」의 인터뷰 기자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천차만별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역사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고 그런 일을 겪으며 희노애락의 삶을 엮어가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내 얘기를 엮어봐, 소설 하나는 되지』하고 말한다. 인간 개개인의 삶이 모여 있는 곳에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가 바로 역사를 이뤄낸다.
그래서 최근 역사학자들은 지도자 중심, 귀족 중심의 역사에서 묻혀진 민중 중심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각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통치한 소수의 사람들의 영향력을 비교하면 그 시대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소수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단연 우세하고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 지도자들이 큰 흐름을 좌지우지하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큰 흐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아도 개개인의 삶은 역시 개인의 상황이나 개인의 역량, 그리고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상황들이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40세의 나이로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그해 10월 중순경 관구장 수녀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대학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학교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두 달 동안 준비해서 대학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기막힌 일이었다. 겨우 두 달 동안 공부하여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관구장 수녀님과 나 사이에 밀고 당기고 하는 갈등 끝에 나는 그 일을 받아드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료를 찾고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구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이번에는 연습 삼아 시험을 보고 다시 열심히 준비하여 내년에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40세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가. 젊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하며 제도교육의 불필요성마저 강조하였다.
『연습삼아』하라는 말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인생에는 연습이라는 것이 없다. 인생 자체는 모든 것이 실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연습게임으로 하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조언은 없다.
그래서 나는 일단 시작하기로 한 일이게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 자신에게 말하기를 『그래, 아무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아. 이들은 40세에 읽고 외우며 시험공부를 해보지 않았지. 어쩌면 이들의 경험 속에는 내게 충고할 말이 없을 수도 있을 거야. 나의 학업 방법은 내가 스스로 터득하는 거야. 그리고 누군가 나와 같은 처지에 있게 된다면 나는 내 경험을 통해 그에게 조언할 수 있을 거야』했다.
경험과 조언은 남에게서 올 수도 있지만 나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즉 경험과 조언이 내 삶의 영역에서 처음 시작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4년동안 대학공부를 하면서 기대하지 못했던 숱한 체험들을 했다. 강의실 호수도 제대로 외지 못하고 1층부터 4층까지 몇 번이고 맴돌기도 하고,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이들과 공동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나이와 체면 따위도 잊은 채 의견 다툼으로 얼굴이 벌개지기도 하면서 내 생에 가장 귀중한 시간들을 보냈다. 나는 때때로 학교 공부를 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누군가와 나눠보고 싶었다. 그리고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얻고 싶었는데 나와 같은 상황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들이 없었기 때문에 흡족한 조언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나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되뇌곤 했다. 역사란 의식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에서는 2000년을 맞으면서 가톨릭 여성신자들의 활동사를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신자들의 70%정도가 여성신자들인데도 여성들의 활동, 혹은 여성들이 엮어간 역사는 민중의 역사처럼 주변으로 처리되거나 무대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이것을 찾아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역사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인터뷰할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무슨 이야기거리가 되느냐고 반문했다. 신앙체험담은 인터뷰할 때 만난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몇 권의 소설은 될 것이라고 하는 반면, 여성들의 활동,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해달라는 말에는 그것이 무슨 관심거리가 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삶을 뒷받침할 만한 사료나 기록 같은 것도 매우 불충분했다.
E. H. 카는 역사란 그 시점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사상이나 무노하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재해석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재해석을 통해 선대의 사람들은 후대에게 한 문화를 형성시키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게 된다.
그러기에 사료의 불모지대는 문화의 불모지대, 사상의 불모지대와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지금-여기서』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것을 후배들에게 넘겨주는 것은 선택된 소수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신자 개개인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비전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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