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훤히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20년이 가까워지는 일이건만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김없이 떠오릅니다. 남편 친구들 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제주도를 갔다가, 새해 첫날 이른 새벽 일출봉을 찾아가던 때의 일입니다. 어둠 속을 부지런히 달리던 기사가 금방 해가 솟을 것 같다며 일행을 성산 입구에다 내려놓았지요. 웅성웅성 사람들이 어디론가 마구 들어가기에 무작정 따라 들어간 곳. 어디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까요. 긴 강변에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서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키 큰 사람 뒤에 서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이리저리 파고들며 마땅한 자리를 잡고 섰습니다. 잠시 후, 저쪽이다, 저쪽이다!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스름 속에 버얼겋게 물드는 곳이 보였습니다. 추위 때문에도 그렇지만 혹여 놓칠세라 발을 동동 구르며 긴장, 또 긴장! 이윽고 버얼건 더미의 중간쯤에서 빨간 빛덩이가 눈썹만큼 솟아올랐습니다. 나온다, 나온다, 떴다, 떴다! 사방에서 함성이 터지고 빛덩이는 누군가가 아래서 밀어 올리듯 쑥쑥 솟아오르더니 어느 순간 둥근 원이 되어 재빨리 하늘로 치솟아 부웅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입에서 터져 나온 말! “오, 주님, 감사합니다. 마침내 얼굴 보여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기뻐요. 정말 기뻐요.”
이상한 일이지요. 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주님의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튼 시종일관 주님의 모습을 뵙는다는 설렘으로 가슴 두근대며 기뻐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해가 높이 솟아오르자 사람들은 볼 것을 다 봤다는 듯 우르르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순간이 너무 아깝고 아쉬워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는 듯, 일행 중 비비안나 씨가 내 곁으로 와서 머물러 줍니다. 어찌나 고맙던지 손을 덥석 잡고, 높이 떠올라 버린 태양을 함께 바라보며 서 있었지요. 우리 곁에 잠시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 그분 얼굴이 너무 빛나 눈이 부셔서 쩔쩔매면서.
다음 순간, 갑자기 비비안나 씨가 태양 주변을 좀 보라고 합니다. 얼핏 보니 동실 동실 여러 개의 연두빛 동그라미가 보입니다. 하나 둘 셋 넷… 어머나, 저기도 저기도, 아주 멀리까지 사방으로 다 보였습니다. 우리는 정신없이 그 동그라미를 좇아 시선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지요. “성체다! 주님의 성체다!” 그리고 저는 비비안나 씨에게 소곤거렸습니다. “주님께서 잠시 오셨다 가시면서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시나 봐요. 그런데 저렇게들 몰라보고 다 가 버렸으니 어쩌면 좋아!”
비비안나 씨도 제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지요. 우리는 태양 주변에 맴도는 연둣빛 동그라미, 바다 물결을 따라 일렁이는 그 에메랄드빛 동그라미에 취해 넋을 잃고 섰다가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며 성호를 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리를 연발하며.
그 후, 주님께서는 저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2008년 가을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의 일입니다.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이른 아침 호텔 식당 창가에 앉아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주님 발자취가 서려 있는 호숫가에서 밥을 먹는다는 게 꿈만 같아 자꾸 창밖을 내다보는데, 멀리 ‘곤란공원’ 쪽에서 해오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 주님! 저는 저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며 떠오르는 태양을 반겼습니다. 그리고 호수 주위를 살폈지요. 아니나 다를까, 역시 동그라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셀 수도 없이 많은 환상의 성체가!
눈부신 빛으로 오셨다가 생명의 양식으로 성체를 남겨 주고 떠나신 주님!
금년 한 해도 주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초록빛 축복 듬뿍 내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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