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박한 우리 국민들은 소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이제는 진정한 민주화, 사회·경제적 정의의 실현, 분단극복을 위한 자유로운 논의와 접근이 가능한 역사의 새 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이 정권만은 역사의 진보를 위한 최소한의 발걸음을 내딛을 것으로, 특히 국가보안법은 대통령 자신이 야당 시절 국가보안법의 피해 당사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폐찌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예정된 환상이었습니다. 증명이라도 하듯이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구속자가 군사독재정권에 버금갈 정도로 늘어났고,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커녕 부분적 개정조차도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포악무도한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그 뿌리를 두고 민족분단의 산물로 태어났습니다.
이 법은 해방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자유로운 통일논의 및 남북간의 화해 노력을 실질적으로 봉쇄하고, 남북간에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남쪽 내부에서마저 적대와 증오감을 조장하는 분단의 법으로 가능해 왔습니다.
이 법이 명분으로 삼았던 경직된 안보논리, 냉전 이데올로기의 무분별한 확산은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과 사회·경제적 변혁 의지, 민중의 생존권적 요구, 사상·양심·언론·학문의 자유 일체를 억압하는 정권 안보의 도구로써 역할하여 왔던 것입니다. 분단 극복을 위한 간절한 민족적 소망도,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도, 심지어 참교육을 외치는 교사들의 소박한 열정마저도 국가보안법의 도마 위에 올려져 난도질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보안법은 피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수많은 무고한 학생과 양심적인 국민들이 국가보안법의 서슬 파란 칼날 아래 「붉은 빛」의 색칠을 뒤집어쓰고 고통 당해야 했으며, 정치적 희생자는 고문의 비명과 피의 얼룩을 내뿜었던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의 역사를 뒤집어 놓으면 우리 독입운동사가 되듯이 이시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가 바로 정당한 민족민주운동사라는 평가를 후애 역사가들이 내리지 않겠는가?』라고 국가보안법과 민족민주운동과의 관계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국가권력에 의하여 탄압받고 학대받는 수많은 사례들이 얼마나 민족적 정당성 위에 서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이 땅에 발붙여 살아가고 있는 양심적인 사람에게 부여되는 시대적 소명인 것입니다. 어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소명까지도 보태집니다.
1999년 9월 7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신부 30명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며 서울 명동성당에서 단식기도와 농성에 들어갔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민의 정부 들어서 침체되었던 민족민주운동권에게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의 물꼬를 트는 선봉대의 역할을, 국민들에게는 천주교회가 아직까지도 이 땅의 양심과 정의의 마지막 보루임을 재확인시킨 역사적 결단이었습니다.
단식기도에 들어가기에 앞서 문정현 신부 등 18명의 사제가 삭발식을 가졌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생긴 이래 25년 동안 사제들이 삭박단식에 돌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의 요구가 그만큼 절박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제단은 『국가보안법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제한하는 근본적인 독소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추석에도 단식기도는 계속되어 무려 29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피비린내 풍기는 구시대를 청산하고 해방과 구원으로 가는 새날 새희망의 축제인 대희년의 참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마태오 5 15~16)는 말씀은 교회가 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근원적 의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에 나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너무나 당연한 실천인 것입니다. 빛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태움으로써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거나』심지어 어둠으로 빛을 가리려 하는 것은 악의 세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29일이라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단식농성 기간 중에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없었음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삭발단식을 결행한 사제들이 30명에 불과함으로 교회 전체로 보아 소수 입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방관했다면 『한 마이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성서 말씀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기야 요즘에는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면서 거짓말하는 뻔뻔스러운 고관집 아낙들도 있었고, 성서 속에 문구용 칼을 숨겨두었다가 자해행위를 했던 전 안기부장도 있었으니,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려고 하는 것은 고지식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제들이 삭발까지 한 것은 사제답지 못한 과격한 행동이며, 성스러운 성직자들의 권위와 체면을 손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발가벗고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권위와 체면을 손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새천년에는 사람이 존중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상·양심·언론·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사람이 존중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분단된 조국에 살고 잇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람이 존중되는 세상을 막는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이야말로 하느님의 소명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동참하지 못했던 우리들이 새천년에는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에 모두 들불처럼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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