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내내 초청 일정에 매어 있는 나에게 행사가 많지 않은 1월은 안식월이나 다름없다. 방송국 회의를 마쳤지만 다음 약속까지 2시간이 남았다. 명동에서 서울역까지 전철로 두 구간이니 10분이면 충분하지만 걷기로 했다.
‘그래, 나를 쉬게 해주자. 이렇게 아무 일없이 걸어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라기에 단단히 챙겨 입고 나왔지만 그래도 추웠다. 혹한을 밖에서 겪어보지 않은 탓이 크다. 명동성당 앞을 지나 로얄호텔 맞은편에서 걸음을 멈췄다.
23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부터 거리공연을 해왔던 곳이다. 지금은 노래하는 후배들이 많아 격려차원에서 잠깐씩 노래할 뿐 정기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에는 일주일에 삼사일씩 노래를 했었다. 추운 날은 기타 치는 손보다 입안이 먼저 얼어서 얼얼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젊었으므로 그래도 행복했었다.
조금 더 내려오니 투명 비닐천막을 쳐 놓고 찬송가를 부르는 아주머니가 있다. 어느 쪽에서나 또렷하게 잘 들리도록 메가폰 세 개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묶어놓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써있는 빨간글씨가 오늘 같은 날은 가히 엽기적으로 다가온다. 소음 수준인 그 찬양을 듣고 어떤 행인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며,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손치더라도 과연 천국을 누릴 수 있을지를 가늠해보느라고 두어 곡을 듣게 되었다. 인내심의 한계인지 체감온도 탓인지를 따져보며 가던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그 앞으로 ‘우리의 외환은행을 우리 손으로 지키자’라는 피켓과 띠를 두른 소규모 시위대가 지나간다. 어제 밤에 술자리를 함께했던 교우가 그 은행 지점장이어서 인수 합병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원들의 애환을 들었던 터였기에 가슴이 시려왔다. 약속이 없었다면 별 도움이 안 되더라도 한동안 따라 다녀주고 싶었다.
갑자기 어디서 단속되었는지 모를 노점상 수레들이 단속반원들의 손에 끌려 줄지어 내려가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길가에서 무언가를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다 잠깐이 아니라 날마다 추운 거리로 나와야 하며, 단속되지 않았다면 오늘 밤 늦게 들어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나와야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울 텐데,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단속반원들과 숨바꼭질도 해야 하며 급한 경우에는 수레를 끌면서 줄행랑도 불사해야 한다. 별일 없이 하루를 잘 지낸 후, 밤 열 시까지 노래하고 있던 내 앞에 멈춰선 다음, 앞치마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두 장을 꺼내어 모금함에 넣고 가는 거룩한 손이 끌려가는 손수레와 오버랩 된다.
명동 지하상가와 남대문 지하상가, 지상 남대문상가를 거쳐 숭례문 지하상가와 서울역 지하상가까지 걸으면서 만났던 수많은 길거리 상인들의 시린 얼굴들을 가슴에 담은 채, 두 시간 만에 서울역 대합실에 닿았다. 한겨울 대합실 고객은 노숙인들이 압도적이다. 씻지 못해 지저분해 보이는 얼굴과 오랫동안 세탁하지 못한 채 낡을 대로 낡아버린 의복들. 아무리 마음을 다독이며 애를 써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악취와, 술에 취한 채 아무에게나 해대는 욕설과 폭언까지,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한자말 ‘영광’이라는 단어의 라틴어 말인 ‘글로리아(Gloria)’의 본디 뜻은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우리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logos)대로 사람이 만들어졌기에, ‘하느님의 뜻’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표현된 셈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만났던 이 사람들이야말로 오늘 내가 받아들여야할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신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람들에게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 내가 결코 끌어안을 수 없는 이 사람들에게서. 태중소경 앞에서 제자들이 겪었던 딜레마를 오늘 내가 다시 만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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