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하는 것이 없던 자랑스러운 내 아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 신명남(안토니아·85)씨는 어린 시절의 이 신부를 이렇게 표현했다. 1962년 9월 19일 부산 출생 이태석 신부. 그는 공부, 음악, 신앙생활 등 못 하는 것이 없는 착하고 똑똑한 아들이었다. 다달이 상을 타와 상장으로 도배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운 홀어머니에겐 온 세상에 자랑해도 모자랄 아들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몹시 배우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이 신부는 성당에 있는 오르간으로 피아노를 독학했다. 이뿐만 아니라 첼로, 색소폰, 클라리넷 등 듣도 보도 못한 악기도 독학으로 연주했다.
작곡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만든 ‘성탄’ ‘둥근 해’ ‘작은 별’ 등과, 중학교 3학년 시절 작곡한 ‘묵상’, 의대 재학시절 작곡한 ‘아리랑’ 등의 곡에서는 음악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엿 볼 수 있다. 중학교 시절 부산시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작곡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악보로 남아있지 않다. 무엇인가 남겨 자랑하는 것을 싫어했던 이 신부의 성격 때문이었다.
198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신부는 어머니의 반대로 신학교를 포기하고 인제대 의대로 진학한다. 그러나 아이들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그는 이미 돈보스코 성인과 닮아 있었다고 가족들은 회고한다. 어린 시절, 길을 걷다가도 고아원만 보면 그 앞을 기웃거렸던 그는 입버릇처럼 ‘나중에 커서 돈 벌면 고아원 차릴거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패션쇼, 마술쇼, 마이클 잭슨 춤 등을 선보이며 아이들과 함께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던 이 신부는 조카들에게도 인기 만점 삼촌이었다.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90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투신할 곳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영성의 수도회를 찾았다. 바로 청소년 교육을 카리스마로 삼고 있는 살레시오회였다.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한 그는 1992년부터 광주 가톨릭대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97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2000년 6월 28일 로마에서 부제품을 받을 당시, 그는 이미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사제로서 살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2001년 6월 24일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11월 “한국에도 어려운 벽지가 많은데 왜 꼭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느냐”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라는 답을 남긴 채 그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전화를 하려면 헬리콥터로 4시간을 날아가야만 하는 오지 중의 오지 아프리카 남부 수단 톤즈. 전기도 없고, 내전의 총성이 그치지 않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곳에서 이 신부는 8년을 살았다.
그가 이처럼 톤즈에 자신을 투신한 것은 그의 ‘성소’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말씀과 중학교 1학년 무렵 성당에서 본 ‘다미안 신부’ 영화를 통해 성소를 느꼈기 때문이다. 다미안 신부는 19세기 말 하와이 칼라와오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다 결국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죽은 픽푸스수도회의 사제다.
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렸던 이태석 신부의 삶과 한센병 환자들의 목수이자 벽돌공, 농부이자 제빵사, 의사이자 간호사였던 다미안 신부의 삶은 닮아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었을까? 성당을 먼저 지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며 모든 기준을 예수님께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이 신부. 중학교 3학년 시절 십자가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만들었던 노래 ‘묵상’의 가사처럼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이웃들을 사랑했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톤즈 사람들과의 이승에서의 사랑은 길지 않았다. 2008년 11월 휴가차 잠시 한국에 돌아온 이 신부는 생각지도 못한 말기암 판정을 받게 된다. 당시 검사결과를 전한 순천향대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유병욱 교수는 “당시 암 판정을 받은 신부님은 자신이 암에 걸린 것보다 그 때문에 아프리카에 남겨두고 온 일을 못하게 된 것을 속상해 했다”고 말했다. “우물을 파다 말고 왔는데, 열흘있다 수단가야 되는데…. 아이들이 기다리는데…”하며 망연자실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여 년 간 이어진 투병생활, 16차례 고통스런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투병생활 내내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아프지 않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말한 것이 그가 한 유일한 거짓말이었다.
“임종을 하루 앞둔 저녁, 이태석 신부는 돈보스코 성인을 만났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 신부는 두 손을 모아 ‘돈보스코!’를 외치더니 크게 십자가를 그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축복했다. 이 신부는 발치에 서 있던 윤석렬 수사에게 ‘에브리싱 이즈 굿(Everything is good!)’이라고 말한 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두 손을 덮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음 날인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 이태석 신부는 가족들과 동료 수도자들이 보는 가운데 웃는 얼굴로 떠났다. 천국 문을 연 그의 나이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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