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러 해 전 뜻있는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저를 ‘이모’, ‘고모’라고 부르는 조카딸 12명이 그 회원입니다. 어린 시절 외갓집, 이모집, 고모집, 하며 왔다갔다 하던 사촌들.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하면 얼마나 가까운 친척입니까? 그런데 결혼 후에는 아이들 뒷바라지에 바빠 여간해서는 만나기가 어려워졌지요. 다행히 저는 책을 낼 때마다 조카들에게 우송하다 보니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다 알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던 중 조카딸들이 중년이 되고, 어느 정도 시간 여유가 생기자 저에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모임을 주선해 ‘이고모회’라는 이름을 짓고 매년 겨울 방학 때 한 번씩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달려와 어린 시절 추억담에 곁들여 현재의 삶을 나누면서 어찌나 기뻐하는지 뿌듯하기 그지없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서로 축하하고, 궂은 일이 있을 때는 서로 힘을 합하면서 정을 쌓고, 더욱이 모두가 교우라서 신앙체험까지 나누고 있으니 금상첨화입니다.
엊그제 그 모임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유방암 수술을 하고 결석한 50대 초반의 조카딸 이야기입니다. 수술하던 날, 가족들과 함께 수술실 앞에서 묵주기도를 드리기로 했는데, 하필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저는 집에서 기도만 하고 가지 못했습니다. 그날 가족들이 수술실 밖에서 3시간 넘도록 기도하며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와 보호자를 찾더랍니다. 남편을 앞세워 달려가니 “수술은 잘 끝났다. 지금 마취에서 어느 정도 깨어났다.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강의 준비해야 한다’하며 아버지를 자꾸 부른다. 완전히 깨어나서 병실로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지금 옮기는 게 좋겠다. 비몽사몽간이니 그런 줄 알고 병실로 가서 안정을 취하도록 해라.” 하더라는 것입니다. 현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직도 맡고 있는 조카딸. 항상 바빠하면서 어려운 일에 봉착할 때마다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던 조카딸의 일상이 훤히 떠올라 안쓰럽게 듣고 있는데, 다음 말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밖으로 실려 나오더니 울먹울먹하며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더랍니다. 마침 폭설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선 85세의 친정아버지가 막 수술실 앞에 도착해 “응, 나 여기 있다, 여기 있어.” 하며 손을 잡아 주는데, 환자가 외친 말. “아버지, 아버지, 감사합니다.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그 말을 듣고서야 다들 그 아버지가 하느님 아버지임을 알고 움찔했답니다.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오냐, 오냐 하던 육의 아버지는 머쓱해서 딸의 손을 슬며시 놓았다지요. 조카딸은 병실에 올라가서도 계속 울면서 “아버지, 아버지, 감사합니다.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라고 부르짖었다니 기특하지 않습니까?
병원 간호사들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날 때, 환자의 반응이 각양각색이라고 합니다. 엉엉 우는 사람, 화를 잔뜩 내는 사람, 어머니를 찾는 사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는 사람 등등 가지가지라는군요. 그 중 아주 점잖은 분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하는 경우도 있어 듣기 민망할 정도라고 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아닌 게 아니라 한 인간이 매 순간 겉과 속이 완전히 여일할 수는 없는 모양이지요. 인간에 따라서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페르소나, 즉 가면을 자신 안에 두어 개쯤 감추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말로 나오기 마련이라는데 마취에서 깨어날 때의 조카딸처럼, 제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갈 때, 아버지를 부르며 찬미와 영광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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