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희년의 기쁨
기대 속에 대희년을 맞이한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희년의 의미를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보면서 다른 해와 다르지 않게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교회 안팎의 각종 행사나 변화로 미루어 보아 외형적으로는 분명 대희년을 살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흐뭇함과 보람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희년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나의 삶을 점검 반성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절실합니다.
물질이나 화폐를 중심으로 하는 효율성 강조의 세태속에 부지불식간 인격과 생명의 존엄성을 잊고, 협력이나 정당한 절차를 무시하면서, 경쟁과 목표완수에만 급급하여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상궤를 벗어나 복권구입, 주식투기 등 사행심의 늪 속에서 오로지 이기심과 반인간적 작태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가끔씩 「놀부의 작위적인 자비심」으로 자신과 이웃을 속이고 있지만 위장된 방생의식(放生儀式)이 본래의 뜻을 변질시키듯 원칙과 규율의 바탕 위에서 보람과 기쁨을 맛보려 하지 않고 파격이나 변태를 통한 일과성 희열을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희년의읨가 크게 왜곡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었습니다.
회개는 참기쁨의 선결조건이며, 겸손함을 되찾는 것은 회개의 전제입니다. 겸손은 무조건 자기를 낮추거나 굴종의 상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참 존재는 창세기에 지음을 받은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의 상태에 덧붙여진 더러움까지도 숨기거나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이려는 용기가 바로 겸손이요 통회의 전제입니다. 기쁨을 맞이하는 준비작업은 새로운 결단으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자신의 분수를 깨닫는 길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가능합니다.
Ⅱ. 평신도 본분
일상생활을 통해 이웃과 화해하고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평신도의 사명입니다. 일과 쉼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일이 전제된 쉼만이 본 의미를 가집니다. 이때에 비로소 안식일의 축복은 제 의미를 되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각기 전문영역별로 이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로서의 평신도가 세상으로부터 교회의 가치를 수호하고 이 가치로 세속을 바꾸기는 커녕 세속논리로 복음의 진리를 훼손시키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최근의 평협사건은 목적적 가치보다 도구적 가치에 얽매여 있는 세태의 반영같아 섬뜩할 뿐입니다.
「회장직분」(이영춘 신부 역주, 르 당드르 신부 저)을 보면 권력·재물·학식·언변이 주도하는 세속과 겸손·덕행·착한 표양이 바탕이 되는 교회의 본색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직을 만들어 성교회를 맡기시고 인류구원사업에 전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본분에 충실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에게 권한을 부여하시고 사제업무수행에 협조자를 배려하십니다. 사제의 협조자가 바로 평신도 회장입니다. 이같은 협조자로서의 직분을 망각하고 마치 삼권분립의 정치제도에서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지역구민을 대표하듯 평신도의 대표로 스스로를 자임할 뿐 아니라 나아가 사제에 대한 견제 또는 대항세력으로 회장의 직분을 착각하는 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올바른 교육만이 잘못을 바로잡고 새 출발을 가능하게 합니다.
Ⅲ. 기쁨과 희망
「사목헌장(기쁨과 희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으로 ①보편교회의 쇄신, ②그리스도교의 일치, ③세상과의 화해라는 기치를 내걸고 1965년말 발표되었습니다. 이 정신은 희년을 살고 있는 오늘 우리의 교회와 사회에 기본지침으로 살아 있습니다. 며칠전 현 교황께서 지난날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과오들을 참회하엿을 때 세상은 이를 크게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참회는 실질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완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구태여 대희년 준비와 연결시킨다면 참회의 시점이 지난 대림절이 아니라 금년 사순절이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기쁨과 희망」의 준비가 참회에 있다는 훌륭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바탕은 거짓꾸밈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입니다. 적어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전정한 회개와 반성이 앞서야 「용서에의 희망」과 「화해라는 기쁨」이 가능합니다. 현재 우리의 처지가 이러한 자명한 논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를 방치하거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차분하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서두르거나 건성으로 현실을 호도할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제대로 알리고 알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 길만이 옳은 길이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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