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온혜분회 이기환(예비신자·42)씨의 눈망울에는 벌써 눈물이 글썽였다. 주인 잃은 축사에는 소에게 먹이려고 가을부터 준비한 짚만이 높이 쌓여 있었다. 이씨는 지난해 12월 10일 생때같은 소 8마리를 살처분, 매몰했다. 그중에는 서울 한강본당과 의정부 행신본당이 입식한 3마리도 있었다.
▲ 이기환씨 구제역 발생일지
앉은 자리에서 자식 같은 소들을 잃어야만 했다. 다리가 풀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떻게 키운 소였던가? 축사 옆 이씨의 논밭에서 나온 부산물 유기농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콩깍지는 물론 보릿겨, 쌀겨, 비타민, 무농약 지역 칡줄기 등을 섞어 만든 건강한 사료만을 먹이며 애지중지 키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름을 붙여주고, 배설물도 바로바로 치워가며 깨끗하게 키운 소였다.
그렇게 키운 소를 살처분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축사 앞 길목을 가로막고 살처분 관계자들과 대치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그는 소들의 마지막 울음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고 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살처분 직후 이씨 축사의 소들이 구제역 음성판정이 나왔다는 사실.
소를 땅에 묻는 것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일주일 뒤에 겨우 집 밖으로 나와 소 무덤에 가서 미안한 마음에 막걸리 한잔을 뿌려줬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가슴 속 깊이 박혀버렸다.
이씨를 비롯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축사는 유기순환적 소사육을 지향한다. 일명 ‘가농소’다. 소를 도축하기 위해 키우는 공장형·기업형 축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농민회 자체 소사육위원회가 마련돼 있어 판로와 가격, 생산방법까지도 규정을 만들어 철저하게 유기순환적으로 키웠다. 농사를 지은 유기농 부산물을 소에게 먹이고, 소의 분비물은 다시 농사에 사용하는 방식이다.
안동지역에 가농소는 전체 200두밖에 되지 않는다. 온혜분회에서는 이씨만 피해를 입었다. 아직도 두 축사에서는 구제역이 발병하지 않은 상태지만 여전히 구제역 공포에 떨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쌍호분회의 피해는 더욱 크다. 가농소를 키우는 5가구가 모두 피해를 입었다. 상황이 심각해서 외부인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를 자식같이 생각하던 분회 회원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어서 외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쌍호분회 최재호(마르티노)씨는 “자식같은 소들을 잃고 나니 허무함밖에 남은 게 없다”며 “멀쩡한 소를 이웃축사에서 구제역이 발병했다는 이유만으로 살처분한다는 게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유기순환적 소사육은 서울·의정부교구 도시생활공동체와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가 10여 년간 함께 진행해 온 친환경 농업 프로젝트다. 때문에 이번 구제역이 농민회 회원들에게 미치는 여파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현재 보상은 50%정도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나머지는 구제역이 일단락 된 이후 kg당 단가를 측정해 보상될 예정이다. 보상에 있어서도 농민회 농가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유기순환적 사육방식을 지향한 가농소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보상이 제대로 이뤄질리 만무하다.
온혜분회 회장 이태식(53)씨는 “밤낮없이 회의하면서 유기순환적 소사육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구제역으로 인해 그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안타깝다”며 “그래도 자매결연한 본당 신자들이 농민들의 아픔을 함께해주시고, 서울 우리농에서도 힘을 실어줘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 지난해 12월 10일 살처분된 이기환씨의 가농소가 매몰된 곳에 발굴을 금지하는 경고표지판이 남아있다.
▲ 살처분 후 주인을 잃어버린 텅빈 축사는 이기환씨의 허망한 사연을 말해주는 듯하다.
▲ 가농소 먹이로 사용하려고 지난 가을부터 이기환씨가 직접 작업한 유기농 기장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