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하느님은 김로제리오(정식)씨를 만나도록 주선해 주셨다. 이렇게 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퍽 오래 된 일이다. 사막엘 가본 일이 있는데 김로제리오씨를 만났을 때는 삶터가 사막처럼 느껴졌을 때였다.
그는 내 시 「산노을」(박판길 교수가 작곡한 가곡)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도 내 시에 곡을 붙여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꽤 여러 편의 시에 곡을 붙였다. 통기타를 메고 그것들을 들려주었다. 그런 곡 가운데 하나가 「바람 속의 주」이다. 그 뒤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성당엘 들어가든지 잠시 무릎을 꿇고 나올 적에 니 노래를 아는 수녀들을 만나면 그곳이 본당처럼 느껴졌다.
『그 옷차림 스친 곳에/스며있는 향기를/그 발자국 패인 곳에/굳어있는 믿음을/바람 부는 돌밭 속에서/가득 안은 이 기쁨/내 이젠 다시 헤메이지 않으리/바람 속의 내 주여/그 뒷모습 혼자이나/어디에나 계시고/그 목소리 아득하나/바람처럼 가득해/간절하게 올린 기도로/만나뵈온 이 기쁨/내 이젠 다시 외로웁지 않으리/바람 속의 내 주여』
- 「바람 속의 주」전문. 졸작
문단 생활 몇십년에 몇권의 작품집을 가졌고, 곡이 붙은 시도 얼마쯤 된다. 그러나 「바람 속의 주」만큼 내게 하늘 구경을 시켜주는 노래는 없다. 이 노래는 부를 적마다 들을 적마다 날 허공에 띄워 돌밭을 보게 하고 메마른 골짝을 보게 하고 그리고 날 맨발로 걷게 한다. 때마다 하는 고해성사다.
바람 부는 언덕에 육신을 끌고 올라갈 때엔 숨이 차다. 그러나 영혼이 앞장을 서면 훨씬 몸이 가볍고 마음이 편하다.
바람 부는 언덕에서 내려다 볼 때 그 마음 시원한 것은 산행을 즐기는 사람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찌 산행에서만이랴. 인생을 짐으로 지고 주어진 생애를 오르는 언덕에서 목줄기를 타고 넘는 바람마저 없으면 그 땀흘림과 숨참을 어이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내려다 보이는 시야에는 돌밭과 메마른 골짝인 것을!
그래도 시는 내게 나침반이다.
가슴에 달고 다니는 나침반이다. 어느쪽으로 가야할 일인가 망설여지는 때 마음을 가다듬고 가슴의 나침반을 들여다보면 거기 화살표가 떠오른다. 이 화살표는 하느님의 뜻이 돋보이는 것이라 여긴다. 그 때 선택의 용기가 떠오른다.
『저녁이면 나무들이 / 그림자 거둬들인다 / 밤새 눈비에 젖을까 / 저녁이면 거둬들인다 / 그러나 물 밑에서는 분명히 하나의 당덩어리로 맞붙어잇는 한덩어리이다.
수학여행을 간 친구가 보낸 그림엽서라고 생각하면 바다풍경이지만, 민족의 분단을 아파하는 의식에선 다른 차원의 감상이 가능하다. 시는 노출되지 아니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초록비는 얼마나 슬프길래 / 나무들 가득 눈물 머금었을까 / 지나간 겨울 머나먼 곳에 / 얼마나 슬픈 일 많았길래 / 초록비는 얼마나 슬프길래 / 나무들 가득 눈물 머금었을까 / 지나간 겨울 머나먼 곳에 / 얼마나 슬픈 일 많았길래 / 초록비는 얼마나 슬프길래 / 새들 듣지 않으려 모두 숨었을까 / 지나간 겨울 머나먼 곳엔 / 얼마나 억울한 일 많았길래 / 그러나 겨울 아직 멀리 가지 못하고 / 슬픔 덜어내는 봄비만 사락사락 / 눈 앞에 초록비로 온다』
- 「초록비」졸작
이 계절 봄비를 온몸에 맞고 선채 봄비 스며드는 검은 흙을 바라보고 서있다.
검은 흙에 떨어져 생명을 싹틔우려 스며드는 봄비는 얼마나 다행이랴. 돌밭이나 메마른 골짝에 떨어지는 봄비는 또 얼마나 머나먼 여행을 다시 해야하는가!
「바람 속의 주」를 다시 노래부르며 내 어머니가 내게 남긴 마지막 기도를 돌밭에 뿌린다. 비록 제 두손은 빈 손이오나, 제겐 아직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속이지 않고 산다는 이것입니다. 너무 평범해서 받을 수 없으시다면 제 아들이 대신 받게 해주십시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