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1 : 엉뚱한 물음
그를 처음 만난 건 서울대교구청 주교관 3층에 있던 그의 집무실에서였다. 말단 초년병인데다 처음 대하는 교회 어른이라,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상기돼 열까지 나는 듯하다.
뭐라고 인사를 드렸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이름 석자는 입 밖으로 냈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그는 대뜸 “본관이 어디지요?”했다. “헉…. 꿀꺽.”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질문, “혹시 우리 어머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우리 어머니도 ○○ 서씨이신데….”
그랬다. 그는 긴장으로 온몸이 얼어붙어 있던 내게 지고지엄한 어른이 아니라 자상한 할아버지로 다가왔다. 먼저 웃어 보임으로써 상대의 웃음을 이끌어낼 줄 아는 이,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때도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집무실을 나와 마당에 선 내게 소름 돋칠 듯한 상쾌한 바람이 한바탕 쓸고 지나갔다. 그날 그 시간 이후, 교회와 교회 어른을 대하기도 전에 피어오르던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은 기쁨과 용기로 바뀌어 내 걸음을 이끌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같은 스테파노네….” 그가 직접 건네준 묵주를 꺼내볼 때면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교차한다.
# 장면2 : 거길 가보고 싶은데
1997년 12월 서울 행당동 산기슭. 그는 겨울이 깊어 마음마저 시린 행당동 철거 현장을 오르고 있었다. 밤색 털모자에 외투로 몸을 가렸지만 매서운 바람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그 며칠 전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의 비서실에서 온 연락이었다. 성탄을 앞두고 내가 취재해 신문에 낸 기사를 보고 “거길 한 번 가보고 싶은데…”하며 힘겨운 철거민들의 속사정까지 파악해간 터였다.
천막으로 얼기설기 지어놓은 철거민들의 살림터 겸 본부는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 찼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민망한 마음에 멈칫대던 철거민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잡은 이는 그였다. 그의 첫마디가 걸작(?)이었다. “미안합니다. 이제 와서….”
갑작스런 사람들의 방문에 놀란 철거민촌 아기의 땟국이 흐르는 볼에 자신의 뺨을 비벼대며 환한 미소를 짓던 그의 모습은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다.
# 장면3 : 아니, 괜찮아요
성탄을 앞둔 즈음이었다. 그의 운전기사를 통해 파악한 그날 예정된 일정은 그의 몸 상태로는 적잖은 무리가 따른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짐짓 염려가 된 내 눈길은 취재하는 내내 그의 표정에 쏠렸다. 한동안 그를 지켜보던 내 눈에 이상한 점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틈틈이 손과 팔을 주무르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이 하도 손을 꼭 잡고 흔들어대는 바람에 노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아픔까지 얻게 됐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수행하는 이들이 일정을 조정하거나 사람들을 막아설라치면 그는 “아니, 괜찮아요”라는 말을 연발했다. “내게는 잠시지만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며 오히려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모습에, 자신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전장으로 향하는 장수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남자,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모두에게 갖가지 추억을 선물하고 떠났다. 그리고 지금 우리 주위에서는 그를 추억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 가운데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바로 그의 정신을 살지 않고 그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얄팍한 모습이다. 그의 삶과 정신을 왜곡하는 일들이 이어진다면 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도 이내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그의 향기가 우리 곁에 오래 머물도록 지켜내는 게 그를 추억하는 이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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