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며 깜짝 놀란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너무 흔하고 반복되었던 질문을 할 때마다 오싹해진다. 주변 것에 너무나 잘 적응되어 모든 것이 척척 잘 돌아가고 편안해져버린 나의 내면에는 『당신 정말 그래도 돼?』하는 질문들이 솔솔 솟아오른다. 폭풍 전야 같은 지나치게 조용함을 느끼고 있다. 열의와 소명의식에 불타 수도원으로 달려왔던 나의 20대가 소리없이 퇴색되어 주변색으로 변했다. 그리스도인은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고 세상에 껄끄러움을 제공하는 사람이라는데 지금 우리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에 너무 친화성을 발휘하는 것 같다.
한국가톨릭 여성들의 실태조사를 하기 위해 인물소개, 문헌자료, 기타 자료들을 얻기 위해 많은 본당과 교회단체들을 찾아가게 되었다. 대부분의 공동체들이 역사적 자료들은 물론이고 역사성이 있는 인물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물론 한국가톨릭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사회적 문제로 가져가기 이전에 교회의 중요한 내부 문제로 지적하고 싶다. 주요인물의 개인사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당 혹은 단체의 역사적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게대가 공동체의 목표도 거의 단기적인 것이어서 마음의 무척 안타까웠다. 아무리 한국인이 신바람 민족이라지만 목표도 불문명한 채 맨몸으로 뛰어가는 것은 근시안적 자세라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의 사회 문제도 바로 이런 즉흥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처럼 내일을 쳐다보지 않고 즉발적인 효과만을 기대하는 삶의 방식은 후배들에게 비참한 사막을 남겨주게도 하지만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실속없는 껍데기의 삶의 비애를 맛보게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느 카리스마적인 인물에 의해 지도되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시대는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책임을 지며 공동의 역사와 공동의 삶을 이루어나가는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협의할 수 있는 계획, 조금 빗나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있는 계획, 마음을 추스릴 수 있는 계획을 세워 함께 움직여 복음적 삶을 증거하는 공동체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에게도 한 개인의 역사를 남겨주지 않으셨다. 개개인이 자신의 역사와 자신의 응답에 의한 결과에 책임을 지라고 하신다. 감히 남의 역사를 떠맡는 공동체 운영방식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자신의 의견이 진리나 되는 것처럼 밀고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결정된 것을 남에게 떠맡기는 일도 흔하다. 공동체에서는 제안을 내면 그것을 논의하고 함께 책임질 생각은 안하고 『네가 말했으니 네가 해보라』하는 식으로 밀어붙인다. 행사를 하기 위해 무언가 좋은 의견을 내놓는 회의를 할 때 나는 자주 망설이게 딘다. 이런 말하면 또 나에게 다 하라고 할까봐 눈치를 보며 주저한다.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의견은 좋은데…』하면서도 이것을 실행하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아 결국 『성질급한 사람이 제풀에 다 뒤집어 쓰기도 한다』정말 이런 상황에서는 늘 자괴감을 느끼며 다음에는 정말 수동적으로 참여해야지 하는 엉뚱한 결심을 하게 한다. 사막의 종교는 『청각의 종교』라고 했다. 즉 듣는 종교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공동체의 말을 듣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종교이다. 들음으로써 내면을 들여다보며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과 만나는 만남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다. 알아서 해주겠다는 공동체의 태도가 신앙의 장애요소라면 『당신이 해봐』하는 식의 뒤집어 씌우는 공동체의 결정도 독소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고, 각자가 가진 것을 서로 내놓아 몇 배의 풍요함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의견을 귀로 들을 것이 아니라 온 존재로 들어야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며 공동의 합의점을 찾아내고 거기서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아내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공동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명령지시적인 세상에서 너무 많이 길들여져왔다. 오늘 우리는 곳곳에서 그것이 뿌려놓은 독소의 결과를 보며 가슴 저려한다. 그런데도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최면에 걸린 생활을 계속하려고 한다. 나만 잘난 것이 아니듯이 나만 못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이제 서로 얽히고 서로 기대어 새로운 출구를 찾아 관꼐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삶의 방식이엇지만 교회가 제도적으로 성장하면서 퇴색되어왔던 부분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초대교회로, 예수님의 시대로 되돌아가 예수님의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라는 시대적 부름을 받고 있으며 전면적인 회심을 통해 하나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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