뎅그러니 한 장으로 남은 올해 달력 앞에 서서 초등학생처럼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남은 날 중 약속이 없는 날은 한쪽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다. 형편없이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을 표시한 그 많은 동그라미들이 결국 시간을 헛되어 보낸 증거처럼 여겨져 더욱 쓸쓸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온전히 남은 날들은 보석처럼 귀중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며칠 안 남은 이 가까운 날들을 무심하게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더라? 그것들을 찾아서 남은 시간을 그것들만으로 채울 작정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우선「종일 집에 있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꽃, 나가서 먹는 한 끼 점심 값을 후하게 쳐서 그 돈으로 담뿍 꽃을 사자. 그리고 벼르던 책을 전부 사고, 사랑하는 예쁜 찻잔, 두 남녀가 황홀하게 춤추고 있는 그 찻잔에 얇은 커피향을 담는다. 백건우의 피아노를 들으며 벼르던 책들을 읽는 것. 음반은 우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 다음 그리그나 라벨도 좋고…. 매일 한 장씩 군대에 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
그 중 하루는 식단을 근사하게 준비하고 세 식구나마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리라. 그것으로 충분할까?
그러다 보니 불현듯 어머니의 쭈그러진 손등이 만져보고 싶으면서 아련한 그리움이 일었다. 어머니는 같은 서울에 사시고 쉽게 만나는데 무슨 유난스런 감상일까. 그러나 나는 금새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지는 것. 그것은 모시는 일에는 뒷걸음질 치면서 내년에도 어머니가 계시기를 바라는 모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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