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자들이 힘이 없다. 대부분 땅을 일구고 살아가고 있는 촌 본당 신자들에게도 「사과 상자」가 유행어처럼 떠돌고 있다.
모두「한보사태」로 인한 것이다. 막말로 뼈 빠지게 땡빛에서 일해봐야 비료 값, 품삯을 제하고 나면 본전 찾기도 힘든 농삿일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 TV와 신문을 통해 떠들썩한 한보사태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 안해도 뻔하다. 모두 풀 죽어 있다. 여기저기서 나랏님을 향한 원성이 대단하다.
이런 기분은 명절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부모를 뵙고 뜻깊은 명절을 보내기 위해 먼곳에서 찾아온 자식들의 처진 어깨를 바라보는 촌로들. 부모들에게 명절이라고 좋은 선물을 사 드리고 싶지만 처지가 그렇지 못해 죄스러워하는 이 땅의 자식들 모두 사과 상자 헛개비에 살 맛을 잃은 모양이다.
내 사정도 마찬가지다. 명절이면 집에서 정성껏 만든 음식을 가져와『신부님 별 것 아니지만…』하고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찾아오는 이가 현격히 줄었다. 내게도 누가 사과 상자 하나 갖다주지 않나? 몽상에 젖어본다.
모두들「사과 상자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 안 되는 일이 없게 만드는 요술 상자 때문에 명절의 풋풋한 정도 없어지고 열심히 살아서 뭐해 하는 의식만 팽배해졌다. 혹시 성당에 열심히 다니면 뭐해 하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을지 두렵다.
그런데 이 망령의 정체를 파헤치겠다고 다른 나라 정상들과의 회담마저 미루고 나선 우리 대통령의 태도가 더욱 염려스럽다. 성역없이 수사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리가 드러나면 처분하라고 했다지만 국민들은 믿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되자마자 비리 척결을 통해 개혁을 외쳐왔지만 그 결과가「날치기 망령」에서「사과 상자 망령」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제 1년 밖에 안 남았는데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말년에 저 고생일까. 측은지심마저 들 정도다. 혹시 그도 사과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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