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돌연한 망명사건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더구나『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하고 싶은 심정에서 북을 떠나 남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하여 망명을 결행했다는 그의 고백은 남북한의 냉엄한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어서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이미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개되고 있는 살벌한 현실 상황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황장엽의 망명을「납치」로 규정하고 펄쩍 뛰는 북한과 그의 안전한 서울행을 서두르는 한국 정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외교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 불똥은 중국과 미국 등 동북아 관련 국가에 번지고 있다. 아마도 북한 내에서는 황장엽 자신이 우려했듯이 처절한 희생이 뒤따를 것에 대한 공포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과연 이처럼 긴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도『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그의 염원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그의 서울행이 이루어지건 아니건 또 이 사건으로 오히려 남북관계가 임시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더라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앞당기고자 한 그의 염원은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 몫은 우리의 몫이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망명의 순수한 뜻을 존중하고 살려가는 것이다. 만약 어느 누가 이를 정치적으로나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그 순수한 의미는 퇴색되고 말 것이다. 벌써 중국은 국제관계를 무시한 우리 정부의 조급했던 처사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언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건을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폭로와 공명심에 치우쳐 남북한 관계를 더욱 긴장시키고 또 여기에 상처만 더하게 된다면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다.
우리 교회의 입장에서도 황장엽의 망명사건은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한다. 그의 망명은 북한체제의 현실적 한계를 극명하게 내보여준 것이며, 남북관계가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 이정표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 사건은 단순한 망명사건에 그치지 않고, 남북관계의 현상 유지가 사실상 파괴되고 있음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북관계는 이미 지각 변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변화의 본질을 우리 교회도 꿰뚫어 보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교회는 이번 망명사건으로 인해 남과 북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야기될지도 모를 갈등과 혼란을 냉철히 통찰하면서 이 사건이 궁극적으로 민족 화해와 일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되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사회 내에서는 한보사태의 파장으로 빚어진 정치적 불안과 맞물려 왜곡되거나 이용되지 않도록, 그리고 북한에서는 인도적 각성과 체제 변화의 새로운 계기가 되도록 촉구하는「시대의 징표」를 선명히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사건의 처리 과정 중에「이한영씨 피습사건」과 같은 테러가 거듭되고, 이 때문에 정치 사회 불안이 가중된다면, 우리 교회는 시급히「시국의 안정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시작해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남과 북을 막론하고 이러한 충격을 흡수하며 성숙된 해결을 모색할 만큼 충분한 내구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기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통일사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준비 태세를 본격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통일과정에는 이번 황장엽의 망명사건 이상의 충격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며, 통일 후에도 이에 못지 않은 수많은 어려움이 밀어닥칠 것이다. 여기에 적절히 대응하는 사목적 대안을 찾는 것이 통일사목이라면, 교회가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견하며 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통일에 이르는 각 단계별로 이에 맞는 인력의 배치와 재정적 투자가 뒤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준비가 뒷받침되어 있어야만 비로소「시대의 징표」증거와 실천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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