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는 조그만 집이나마 다리를 쭉 뻗고 잠잘 수 있는 내 집도 생겼고 조그만 구멍가게라도 보아서 굶지 않게 되었으며 비록 몸은 불구로 침대에 누워는 있다 해도 그런대로 건강하게 저를 지켜 봐주시고 햇볕에 검게 그을은 얼굴에 두 팔로 힘 있게 휠체어 바퀴들 돌리며 운동을 나가시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한없이 대견스럽고 잠시나마 고달픔을 잊고 그 어떤 보람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답니다.
이제는 울지도 않으렵니다.
그 어떤 절망과 시련이 저에게 또 닥쳐온다 해도 결코 절망하지 않겠읍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제 고향은 충남 논산군 연무읍 조국강토를 지키는 국군의 요람인 논산훈련소가 한눈에 건너다 보이는 금곡리 마을입니다.
환갑이 넘으신 홀어머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작은 오빠내외와 조카들과 함께 별다른 걱정 없이 오붓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녁노을이 서산마루에 붉게 물들일 때면 조카 녀석의 고사리 손을 잡고 훈련소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훈련병들의 군가소리를 귓가에 들으며 동구 밖 논두렁길을 거닐며 아름다운 낭만에 흠뻑 전어보기도하고 밤이면 뜨락에 앉아 밤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별을 헤이며 실개천이 흐르는 동산아래 비들기집처럼 예쁘고 자그만 빨간 기와집을 지어 갖가지 꽃을 심어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어 놓고 책이나 읽으며 조용하게 살아가는 소녀의 아름다운 꿈을 그려보기도 했던 갓 스물두살의 앳된 시골계집아이가 되어 있었읍니다.
제가 지금의 저의 남편「최한철(베드로)」씨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1967년 푸르름이 한창 더해가던 5월의 어느 날이 었읍니다.
그날도 아침을 먹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저는 우체부 아저씨로부터 받은 신문을 버릇대로 그 자리에서 펴들었습니다.
대전에서 발행되고 있는 J일보였읍니다.
「울다울다 지쳐 눈물도 말라버린 예비역 소위」라는 커다란 활자가 제 눈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눈길을 떼지 않고 기사 내용을 훑어 내려갔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며 피눈물 나는 고악으로 대전C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ROTC 제1기생으로 임관하여 전방에서 복무 중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쳐 하반신마비의 비참한 불구자가 되었지만 공부집행 중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고 원호혜택도 받지 못하고 생활비도 안 되는 쥐꼬리만한 동생의 월급으로 늙으신 부모와 가난하게 살아가는 형편에 제대로 약 한 첩 써보지도 못하고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려 했지만 살려는 의지…
그래서 참된 인간의 구실을 해보기 위해 휠체어라도 하나있으면 건강한 두 손과 머리를 이용한 정신적인 노동은 무엇이고 하려해도 그것마저 구할 수 없어 비통은 더 큰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였읍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고 난 순간 아-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삶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인가 보다 그런 운명 앞에서도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휠체어만 있으면 정신적인 노동은 무엇이고 하여 완전한 건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병들어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참된 면모를 보여주고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해보겠다는 그분의 의지에 저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했읍니다.
휠체어는 어디에서 구하는 것일가? 너무너무 가혹한 운명의 그분생각으로 몇 날을 보냈읍니다.
『내가 만약 그분께 휠체어를 사드릴 수 있다면…내가 그분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하고 생각하던 끝에 저는 그분께 마음의 위안이라도 되어 드릴까 하는 마음에서 MBC 문화방송에서 발행한『절망은 없다』는 책을 예쁜 종이로 정성껏 싸서 의지를 잃지 말고 굳세게 살기 바란다는 위로의 편지와 함께 그분께 보내 드렸읍니다.
며칠 후 그분한테서 곧 회답이 왔습니다.
이것이 저와 남편과의 첫 인연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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