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일치의 염원은 열교(裂敎)와 이교(離敎)가 생겼을 때부터이다.
동방정교회가 갈라져 나간지 900년이 지났고 프로테스탄트가 생긴지 400년이 지났다.
그동안 동방정교회는 제17차 프로렌스 공의화(1438~1445)에서 양축의 완전한 합의로 일치선언을 한일이 있었으나 일반신자대중이 호응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실패한일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교회일치운동이 일기 시작하였다.
특히 요한 23세 교황이 제2차「바티깐」공의회의 소집을 선언하면 전 세계그리스도교 신도들에게 교회일치운동을 호소함으로써 이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리하여 제2차「바티깐」공의회는 제1회기에서 45명, 제2회기에서 63명의 갈라져나간 교회의 지도자들을 옵저버로 참가케 하여 교회일치의 당위성과 그 방법을 숙의하였다.
이 운동을 위하여 교회헌장은 타교파(他敎派)에 대한 일치의신학적 근거를 설명하였고(교회헌장2-15)교회일치운동에 관한 지도서를 발표하였고(1967·11·21) 또 교황청 내에 교회일치국을 두게 하였다. 이외에도 종교자유선언,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등을 발표하여 갈라진 형제들의 일치는 물론 비 그리스도교인 종교인과의 화합을 강조하였다.
제2차「바티깐」공의회는 교회일치 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교의상(敎義上)의 토론과 설득에 앞서 서로미워하지 말고 사랑의 대화를 통하여 형제애로써 서로사랑하고 서로의 공통점을 찾고 점차로 그 차이점을 해결하는데 공동으로 노력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를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아반성이 있어야하고, 과거를 따질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치를 위하여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교회헌장은 전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다시강조하고 비록 교파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많은 근본이 같기 때문에 같은 형제임을 인식하고 서로 존중하며 성신 안에서의 참된 결합을 이룩해야 한다고 하였다.(교회헌장2~15참조)
일찌기 바오로 사도가「나는 심었고 아뽈로는 물을 주었을 뿐이오, 하느님이 자라게 하셨읍니다」(꼬린토전서3~6)라고 한 말과 같이 일치의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고, 그 성공은 하느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일치의 씨는 세계의 모든 땅속에 뿌려졌고 지금우리들은 그 위에 물을 주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타 교파 신자들 가운데는 물론,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도 이 교회 일치운동을 잘못이해하거나 성급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아니하다.
이 일치운동은 하느님의 계시(啓示)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 계시 밑에 결합하자는 것이지 결코 교의의 절충을 꾀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 현세적인 공동사업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일치운동은 교회분열이 생겼던 역사적인 상항과 그 후 오랜 분열상태의 계속을 생각할 때에 일조일석에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가톨릭과 프로테스반트가수백년동안 달리 이해하여온 인식론(認識論)과 계시론(啓示論)의 차이와 오래 계속되어 온 상호간의 오해가 해결되기 위하여는 계속 많은 노력과 점진적인 접근이 있어야할 것이다.
어느 날 어떤 공개석상에서 어느 이름 있는 목사의 발언 가운데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즉, 프로테스탄트는 하느님의 계시를 믿는 교회인데 반하여 가톨릭은 권위(?)를 믿는 교회라고 하였다 질문을 통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면 모든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우고 또 신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톨릭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많은 것들 가운데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가톨릭이 하느님의 계시를 믿는 종교라는 것은 가톨릭의 초보자 뿐 아니라 이교도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인데 갈라진 형제인 프로테스탄트가 모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다 같이 하느님의계시를 믿는 종교이면서도 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프로테스탄트는 각자의 해석에 맡기는데 반하여 가톨릭은 교회의 권위가 해석한다는 차이점이 와전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시정해 준 일이 있었다.
인식론에 있어서 가톨릭은「존재가 인식을 규제한다」고 믿는다.
즉 갑(甲)이 존재하기 때문에 갑이라는 인식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의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주의주의(主意主義)내지 합리주의사상은 그와 정반대로「인식이 존재를 규제한다」고 즉 갑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상가들은 이 양자의 관계를「코페르니쿠스적인전환」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천동설(天動說)이 지동설로 바뀐 것과 같은 큰 변화라는 뜻이다.
따라서 다 같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 교회이면서도 그 계시가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이와 같이 교회일치운동에는 그 심연(深( )에 어려운 문제들이 깔려 있다.
그러나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말한대로 서로가 형제임을 깨닫고 꾸준한 사랑의 대화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시를 바르게 인식하는데 노력하여야할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모든 존재를 다 인식할 수 없다고 하여 그 존재를 부정하는 태도는 특히 신앙에 있어서 용납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