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뒤 저는 연금생활이 시작되었고 친척들이나 친구들 모두가 만류하는 사람뿐이었으나 제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물론 어머니와 오빠의 생각과 주장이 저를 위한 것이며 제 행동이 불효라는 것도 충분히 알지만 그이에 대한 잡념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이한테 써 보내는 편지는 회답이 없었습니다.
저를 멀리하려고 의식적으로 쓰지않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편지를 썼습니다.
하루 이틀 한달 두달 답답하고 지루한 날들이 자꾸만 흘러갔습니다.
날로 여위어가면 제 몸은 결국 자리에 눕게 되고 회답 없는 편지를 써 보내며 살아 온지 1년여-.
마침내 제게는 올 것이 왔읍니다. 그러니까 다음해 여름 어느 날 밤 저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져 그만 정신을 잃고 기절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집안은 온통 수라장이 되고 저는 오빠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 환한 불빛 따라 희미하게 부각되어오는 그이의 얼굴이 천정을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는 죽는 것일까. 이렇게 해서 나는 죽어가는 것일까.
생각하니 초점 잃은 동공위에 맴돌고 있는 그이의 얼굴을 잡으려는 듯 허공을 휘저으며
『한철씨! 한철씨…』하고 그이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며 버둥대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부르면서 마구 제 몸을 흔들어대는 충동을 어렴풋이 느끼며 멀리서 아주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애틋한 넋두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긴 년이 병신을 못 잊고 병을 사고… 글쎄, 몸이나 성하다면 깡통을 찼어도 저 좋다면 보내. 그런데 이거…』
계속 들어오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 같은 아무 감각 없는 어머니의 푸념을 들으며 다시금 깊숙한 늪으로 빠져들어 간다고 느끼는 순간
『별 수 없구나, 별 수 없어. 도무지 이놈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구나.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해. 그것도 네 팔잔 모양이지. 에이구! 참』
마치 귀찮은 물건이라도 내팽개치듯 침통하게 그러나 억양 있는 어머니의 이 말을 듣고 저는 담담하고 음침한 감옥에서 나와 화창하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시기라도 한양 갑자기 정신이 힘차게 솟아나기 시작했고 시들어가던 생명이 영약의 생명수를 마시듯 힘이 솟구쳐 나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가누지 못하는 몸을 일으켜『어머니』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저는 어머니 품에 제 몸을 내동댕이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도 울고, 올케도 울고, 오빠는 돌아선 채 우두커니 창가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제가 이긴 것입니다.
마침내 식구들이 굴복을 한 것입니다.
『아! 이제 나는 그이한테 갈 수 있는거다. 얼마나 몽매에도 눈물 흘리며 그리던 그이 였던가』 금방이라도 훨훨 날아 그이 곁으로 가고만 싶었습니다.
허지만 너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
갈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몸으로 가서는 그이를 돌보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저는 당분간 요양을 해서 기운을 차린 후에 가기로 했습니다.
건강은 의외로 빨리 회복되어 갔습니다. 역시 마음의 병은 값비싼 약도 고도의 의술도 소용이 없고 오직 마음으로 치유를 해야 되는가 봅니다.
그해 가을. 저는 옷 몇 가지를 챙겨들고 아직도 수척한 몸으로 그토록 그리던 그이를 찾아 갔습니다.
그 이외의 생활은 항상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던 밥도 그이 곁에서는 꿀맛 같았고 옹달샘에서 길어 나르는 물 바게스도 어디서 그토록 힘이 솟아나는지 가뿐가뿐 하기만 했습니다.
해는 왜 그리 짧은지-. 해가 동산에 떳는가 하면 벌써 하루해가 다 가곤 했읍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