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權哲身과 日身형제의 산소가 발견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산소 소재지, 楊平郡 江上面 大石理) 금번 발견은 엄격히 말해서 재확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1924년 홍콩에서 프랑스어로 간행된 「한국의 천주교」란 책자에 이미 그 묘소의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그 산소는 교우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고 마침내는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중 인근 본당신부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권씨의 후손을 찾게 되었고 그래서 그 산소를 되찾기에 이르렀다. 천만다행한일이다.
금번 권씨 형제의 산소를 재확인하는 가운데 동시에 그들의 고향도 확인된 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성과였다. 산소에 이웃한 大石里마을이 권씨의 고향이었다고 하는데 이 마을은 오늘에도 「한강포」란 별명을 갖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日身의 차남이었고 후에 哲身의 양자로 들어간 權相問이 바로 이 한강포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신유박해로 순교한 相問은 한국교회의 뛰어난 순교자의 한사람이다.
복음은 어디서나 준비되고 때가 차야 비로소 전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천주교도 이승훈에 의해 창설을 보기까지는 오랜 기간의 준비를 거쳐 때를 무르익혀야했다.
천주교는 西學으로서 우선 남인 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생활에 유용한 학문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權哲身에 이르러 西學은 진리요 道로서 평가되고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마재의 丁若銓 서울의 李벽이 이에 가담하였다.
드디어 李벽은 西學을 종교로서 受容하고 그 교리를 믿고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李벽이 그에게 가거던 교리를 배워 영세하고 많은 책을 얻어오라고 당부했다. 그의 권고를 따라 과연 이승훈이 영세하고 많은 책과 성물을 갖고 돌아왔다. 이에 李벽은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폈다.
학식과 명성으로 존경받던 사람들을 입교시켜 교회의 支柱로 삼고 전파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한 李벽이 그 첫째로 한강포의 권씨를 찾기로 했다.
당시 權哲身은 그 학문과 명성으로 전국각처에서 제자들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李벽의 권고로 5형제 중 맏이인 哲身과 세계 日身이 입교하였다.
입교하자 日身은 즉시 그의 주보성인 프란치스교 사베리오를 모범하여 자신이 직접으로 또는 그의 제자를 통하여 포교에 헌신, 단 시일 내에 실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한강포에 유학중인 李存昌과 柳恒儉을 입교시켜 각기 고향으로 파견, 內浦와 全州교회의 기초를 이룩하게 하였다. 여주의 尹有一이도 그의 제자였다.
1791년 權日身이 교회의 두목으로 고발되어 형조에 붙잡혔다. 처음에 그는 용감히 신앙고백을 했으나 노모 앞에서 그는 배교하는 허약성을 드러냈다. 예산으로 유배 가는 도상에서 매 맞은 상처로 인해 병사하였다. 달레는 그의 유명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日身의 나약한 마지막 얘기를 그 책에서 찢어버리고 싶다고 하여 그의 배교를 못내 애석해했다.
물론 유종의 미를 거두어 주었다면 오죽이나 좋았으랴 하지만 배교했다고 하여 그의 이런 공적마저 무로 돌아간 것은 아닐 것이고 교회의 창설과 발전에 그의 공이 지대하였다 하여 그로인해 그에게 당연히 순교의 탁월한 特恩이 내려져야 한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교회사의 연구가 순교사에 치중했음은 사실이다. 물론 오늘의 교회가 있기까지 순교자들의 피의 댓가가 절대적이었음은 사실이지만 한편 유명 무명의 무수한 증거자들의 수난과 땀의 대가가 교회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했음도 사실인 것이다. 또한 교회사는 문화사적이고 민족사적인 측면에서도 한편으로 실용적인 학문을 소개하고 한편으로 봉건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창조와 이 나라 근대화에 기여한 사실도 더욱 밝혀야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금번 권씨 형제의 산소의 재발견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뜻있는 사실이고 특히 그런 의미에서 교회사적 가치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번 발견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조상들이 발견하고 수집해놓은 성지와 유적지 유해 등을 얼마나 소중하게 관리하고 간직해왔는가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수집과 발견도 좋지만이며 조상들에 의해 수집되고 가꾸어진 것은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요즈음 뿌리를 찾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뿌리를 찾는 열성은 자기근원에 대한 존경의 정도에 달려있다. 그러나 적든 많든 간에 우리는 모두가 한국천주교 전통에 대해 산 증언을 할 의무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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