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나트 신부를 맞아 서울을 비롯 전국주요도시에서 거행된 치유의 밤 행사는 많은 신자들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성령의 도우심을, 그리하여 병고에서의 해방을 간원한 치유의 밤 행사는 한마디로 온갖 기대와 초조, 그리고 희열과 감격이 교차되는 장엄한 분위기속에 진행됐다. ▲소아마비 반신불수 그리고 정신병과 불치의 암 환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병고로 고생하는 형제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성령의 역사하심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 하느님말씀에 대한 신뢰로 이들의 눈들은 빛나고 있었다. 또 그들의 치유를 같이 기원하는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모두가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임을 뜨겁게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벌어진 각종 기적 앞에 신자들은 일종의 두려움마저도 느꼈고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장내를 휩쓸 기도했다. ▲그러나 끝내 아무런 기적도 체험 못한 중병자들도 많았다. 많은 형제들이 땀 흘리며 치유를 기원했지만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실망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였다. 열띤 기도로 성령의 은사가 어떤 형식으로든 모든 이에게 내렸을 것은 사실이다. 단지 外的인 치유와 內的인 치유는 느낌이 다르기에 이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 뿐일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은사를 못 받은 측이 못 내서 운해하는 것을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하느님의 손은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다. 그는 결코 실수를 범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가끔 우리를 불구로 만드셔야 하기도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싱싱한 가지라도 때로는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되는 정원사처럼 궁극적으로는 우리자신의 善益을 위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인 병고가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사실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불구의 대명사처럼 불리 우는 헬렌켈러 여사는 만년에 오히려 그가 불구였기에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을 수 있었고 또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오히려 불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았던가. 병고에서의 해방만을 갈구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에서는 이것만이 결코 전부일수가 없다. 고통 속에 內在하는 주님의 뜻을 헤아려보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어쩌면 그 병고 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은사를 성령께 구하는 자세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