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함께 이렇게 있으니 참 마음이 편해요』
정묘하고도 아름답게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여러 모상을 스테인드 글래스로 장식한 화려하고도 고풍스런 어느 성당의 미사 참예 때 그녀가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속삭인 말이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애정을 느낀 사람이었으며, 그녀는 비속한 표현으로, 이를테면 나의 戀敵이었다.
나도 언젠가 그에게 이끌려 바로 그 성전에서 그와 함께 성찬의 초대를 받았으나 나는 그때 한없이 마음이 불편했으며 옆자리의 그 남자에게 너무 신경이 쓰여 반성도, 기도도 제대로 되지 않아 나중에는 그러한 자신에 대한 짜증이 일어났다.
신(神)은 그런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그것 한가지만으로도 이 현상의 것들로부터 그렇게 멀리서 있을 수밖에 없구나하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이렇게 마음이 편한 쪽과 불편한 쪽으로 양상이 달랐으며 그는 결국 마음이 편한 쪽을 택해 영원히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거룩한 성전의 힘을 빌어 자신의 고매한 인격을 은밀히 상대방으로 하여금 깨닫게 한 것을 나는 증오했으며, 헛되이 주님의 이름을 의치고 다니는 자보다 주를 핍박하는 자가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러나 일인(日人)인「오구무라·이찌로」 신부가 전해주신 글.
미움을 가슴에 품었다가 그것이 꽃이 되는 날 제단에 드리리라.
반항기질이 다분하던 여학교시절부터 대학생활을 거치는 수 년 동안 의식적으로 눈을 가리고 주님의 빛을 피해왔고, 내가 서있는 창조의 풍경을 신도 꼭보고 싶어 한다는 상상으로 곧바로 내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이 이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물러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신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을 역겹게까지 생각했다.
내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던 희의, 그래서 교회주변을 맴돌기만 했었던 떨쳐버릴 수 없던 상념.
신은 어쨌든 나를 사랑하기 마련이라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소위 신이 창조해냈다는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 어쩌면 착각이 아닐까하는 느낌이 무척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2년 전 화려한 스테인드 글래스는 고사하고 제대조차 허술하며 제대뒷면에 초라하게 예수님의 모상이 물감으로 벽에 그려져 있는 살풍경한 시골성당에서 정식으로 미사참예를 하였을 때 나는 나 혼자서도 그 어떤 다른 인간의 사랑이 있지 않았어도 충분히 가식 없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자비를 구하는 예절에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히는 전율을 느꼈었다.
『불쌍히…』
나는 그 누구 앞에서도 그토록 불쌍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나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며 죄악으로 가득 찬 불쌍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절감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도저히 한꺼번에는 감당할 수도 없이, 피어나 떠오르는 죄의식. 기어이 소리를 낼만큼 마음은 벅차올라 눈물방울이 기도서 책장마다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슬퍼도 그 슬픔을 받아줄 사람이 없는 사람은 슬퍼할 줄 모르는 것과 감이 지금까지 나는 나의 슬픔을 쏟아놓을 대상을 찾지 못했던 것이기에, 그리고 이제야 내가 안길 수 있는 분 앞에 왔기에 그다지도 올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 저, 이 지상에 오직 썩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 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한 귀절이 떠올라 더 섧게 울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비를 구하는 대목에 가서는 눈시울이 뜨겁다.
부정까지라고 할 만큼 질서정연한 논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을 기피해 왔던 것이 미사참예를 거듭할수록 이제 그 두려움이 가시고 주님이 나의, 우리의 아버지란 생각이 오히려 남달리 강해지고 이 지상의 모든 것이 하찮은 인간의 마음과 결심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다.
예비신자로서 일년을 넘게 지내면서 미사예절에 참여하는 것을 한주일의 가장 큰 행사,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 기쁨이 또한 주일을 평화롭게 생활하도록 했던 것 같다.
하느님께서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여도 좋고 그저 내가 하느님을 알게 된 것만을 기뻐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조금씩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세성사를 받고 싶은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머리를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전에는 너무 많은 죄를 저질러 왔는데 감히 그 모든 죄의 사함을 받을 용기도 없었고, 그리스도의 성심, 그 사랑의 마음과는 별로 친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는 대상으로 주님을 앞세우려는 무의식에 심한 반발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시니 못한 자식의 응석을 받아들여 주시듯,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의열망을 들어 주시리라 믿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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