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중환자실, 죽음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다가오는 죽음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자니 누구가 환자며 보호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역시 환자와 보호자는 구분됩니다. 환자는 누워있고 보호자는 앉아있으니까요.
누워있고 앉아있는 자세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모습 또한 판이합니다.
뼈만 앙상한 초로의 폐암환자, 피부가 무섭게 검푸른 간암환자, 눈이 붉게 충혈 되고 언어장애를 일으킨 백혈병환자, 신경암환자, 뇌출혈환자…나란이 누워있는 이들 중환자는 뇌출혈에 폐렴의 합병으로 의식을 잃은 채 운명의 순간이 다가온 저의 아버지를 제쳐놓곤 모두가 맑은 의식으로 육신의 고통을 참느라고 이를 악물고 있습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으로 기진해집니다. 지금 저의 머리속과 마음속은 중환자의 고통의 얼굴뿐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의 글은 이중환자실에서 띄우기로 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뜻에서<죽음에의 영광>이라는 말 곧 잘 해왔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의 아픔을 참아내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중환자를 대할 때 그러한 표현이 너무나 헛된 발언이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사무치게 되었습니다. 표현된 그 말의 의미자체에 회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통을 체험해 본 일이 없는 건강한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그 가벼운 마음가짐이 헛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가장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환자는 이십 안팎의 신경암 환자입니다.
담당간호원은 이들 환자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라고 합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그 자신 선고받음을 알고 있다는 일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형인 듯한 보호자가 하루 이틀 모습을 보였을 뿐 그 환자 곁엔 아무도 없습니다. 물 한 모금 따뜻이 떠주는 사람이 없는 이 외로운 환자는 한번도 소리 내어 신음하는 일이 없습니다.
눈을 지긋이 감고 아픔을 달래는가하면 정 참을 수 없을 땐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립니다.
『몹시 아파요?』
간호원은 하루에 한두 번 모르핀으로 진정시킬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이 환자에게 정답게 속삭입니다. 그 정감 어린 위로는 저의 귓전엔 공허롭게만 울려옵니다.
그러나 이 젊은 환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미소를 지우며 위로의 말에 부드럽게 응답합니다.
그 조용한 미소 어린 아픔의 얼굴은 고통과 기쁨이 만나는 하늘의 빛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 환자 침대엔 성경과 휴대용 라디오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일상의 생활도구요 전재산인듯 합니다. 잠시 진통이 가라앉으면 스포츠중계나 음악을 들으며 성경을 읽습니다.
스포츠중계와 성경이라면 불합리한 것같이 여겨지겠지만 그 편안하고 고요한 환자의 고통의 표정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와 거룩한 인상마저 풍기고 있습니다. 현실과 하늘나라의 다정한 담소라고나 할까요.
저는 그의 표정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엿보는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에의 영광>이란 이러한 환자만이 발음할 수 있는 신성한 말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아픔과 싸우는 환자들을 위해 기도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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