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일은 굳이 부활절을 택하고 싶었는데 그것은 나도 새로이 마음의 부활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지나간 겨울, 시골여학교의 일을 청산하고 그곳 그 소박하던 성당도 작별하고 대구로 돌아와 부활 축일에 있을 성세성사를 받기 위해 두어달 동안 교리를 들으려 나 나름대로는 열심으로 다녔던 것 같다.
거의 매일 밤 땅거미가 깔릴 무렵부터, 초봄의 별빛이 쏟아져 내릴 때 까지 수녀님의 감동어린 말씀을 듣곤 했는데 어느 날 자주 늦게 귀가하는 딸자식을 두고 보다 못해 원효사상에 젖어 있는 나의 어머니께서는 기어이 분통을 터뜨리시며,
『무슨 교회가 날마다 저녁도 안 먹고 밤중까지 붙잡아 두느냐?』하고 못마땅해 하셨다.
그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으로 나는 나의 잘못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는구나하고 가슴이 아팠다.
나의 신앙이 참된 것이 될려며는 우선 현재 나에게 처해진 환경과 의무에 충실해야만 되겠다고 통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크리스찬은 모든 생활의 차원을 조금씩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수녀님의 말씀을 내 신앙의 좌표로 삼겠다는 결심이 선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그지없이 간사한 것이어서, 교리도 열심히 듣고 영세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부활축일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실연(失戀)과 사람과 사람사이의 뼈아픈 배신감을 마음과 눈과 귀로써 똑똑히 확인해야 만하는 시련에 부딪쳐, 그로 인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극도에 달해졌고 맹랑하게도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나 남의 눈에는 하찮은 일로 보이는 일에 죽음을 생각하도 하겠지만 나는 그토록 새로운 인간으로서 태어나 주님의 나라에 들기를 바랐으면서도 모든 잘못이 씻어지고 모든 허물이 용서받는 바로 그날 죽음을 생각하는 엉뚱한 착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도 그 정신이 혼란하던 날 저녁 교리시간에 유다의 죽음에 관한 것을 듣게 되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대죄가 아니라 예수님의 또 다른 자비, 은총을 믿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데 그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 주님
저를 심판하십시요.
나는 저절로 두 손을 합장하고 그저 내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있었다.
기도는 정녕 하느님을 변화시켜 우리의 갖은 원을 들어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켜 하느님께로 가까이 끌고 가는 것이라는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얼마나 옮았던가. 나는 유다의 죽음으로 또 하나의 신앙의 좌표와, 기도의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을 씻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세를 받던 부활축일의 기쁨을 표현하기에는 아직 나의 펜이 너무도 무디다. 오직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황홀하고 기뻤던 순간이었다고 감히 외치고 싶고 자랑하고 싶다.
그러나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바로 그 영세일 다음날, 주님께 바치는 사랑 이외 지순한 애정을 가졌으며 마음의 지주이셨던 사랑하는 아버님이 회복 할 길 없는 병환으로 입원하시고 50여 일 투병하시다가 끝내 가족들과 하직하시고 말았다.
그동안에 아버님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깨우쳐 드리지 못하고 그냥 버림받은 영혼이 되어, 갈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시도록, 임종까지 아무 일도 해드리지 못한 것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느님은 나에게 영세일을 전후하여 크다면 큰 시련을 주신 셈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이 쏠리는 자식에게 보다 큰 시련을 많이 주신다니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니, 순명하면서 꿋꿋이 살아갈 것 같다.
또 우리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은 도저히 같을 수가 없기에 감히 이것과 그것을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아무런 죄도 없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신 그분의 부활도 처음에는 그 믿고 사랑하던 제자들에게서 조차 의심을 받아야마 했던 쓰라림과 배신감을 낳게 했는데 하물며 나 같은 인간이 모든 잘못을 구원받고 새로 태어난 즈음에 그만한 대가없이 마음의 부활을 가질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입교일기라고 쓴 것이 너무 자질구레하고 다른 신자들에게는 입맛 쓴 얘기도 없지 않을 것이지만 하느님께 바치는 고백문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있는 마음그대로를 써보았다.
이제 영세한지 넉 달. 아직 나의신앙은 깊지도, 명백하지도 못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에 미숙하고 게으른 점이 너무 많다.
기도만 보더라도 언제나 개인의 영화(榮華)를 위해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니 빠른 시간 내에 내 이웃을 위해 바치는 기도가 되게 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생활하고 봉사와 희생이 남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도록 힘 쓸 것을 하느님께 간구해야 되겠다.
이 모든 애기를 할 수 있게 해주신 천주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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