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7월 초에서 울남성 38차「꾸르실료」수강을 했었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서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해오던「꾸르실료」를 내가 본대로 느낀대로 몇 마디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꾸르실료」라면 이상한 선입견을 가진듯한데 실상「꾸르실료」는 그 자체가교회의 어떤 특수한 조직도 아니요, 어떤 비밀을 간직한 지하조직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길래「꾸르실리스따」끼만 모이고 뭔가 이질적인 인상을 받게 하는가?
이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나타나엑」에게「와서보시오!」하신 것처럼 이렇게 밖에 더 말할 수 없다.
「꾸르실료」는 1949년에 스페인에서 시작된 산자들의 신심쇄신을 위한 단기 영성교이다.
「꾸르실료」(CURSILLO)란 말자체가「짧은 기간의 교육과정」이란 뜻이다.
내가 「꾸르실료」수강을 통해 느낀 것은
첫째로 극히 평범한 신자들의 신심강좌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교육을 받은 신자들이 흔히「나는 과거에는 헛살았다」혹은「나는 과거에 몸덩어리만 성당에 갔지 마음은 신앙인이 아니었다.」등등의 반응을 들을 때 평신도들의 그 신심의 척도를 다시 한 번 재평가 할 수 있었고 따라서 평신도들에게는 꼭 필요한 교육과정으로 생각한다.
특히 지도급의 교회 엘리트들을 위해서는 누구나 예외 없이「꾸르실료」교육을 수강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해서는「꾸르실리스따」들을 이해하고 같이 대화하고 그들을 지도해야하는 입장에서 한번쯤은「꾸르실료」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꾸르실리스따」들의 공동의식에 놀랐다.
한차례「꾸르실료」교육을 위해 입소하면 그 뒤에서 많은 선배「꾸르실리스따」들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협조하는 데에서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의 같은 형제임을 나는 절감했다.
세 번째로 3박4일의 교육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불덩어리가 된「꾸르실리스따」들의 뒷처리가 문제임을 생각한다.
영세입교 한 신자가 수계를 하지 않을 때「냉담교우」라고 한다. 같은 의미로서 전국의「꾸르실리스따」들 중에는 많은 「냉담 꾸르실리스따」들이 있음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꾸르실료」교육을 받은 다음 따라오는 이후 교육문제를 심각한문제로 제기하고 싶다.
네 번째는「꾸르실료」의 발상지가「스페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질적인 요소가 많다.
첫째로 용어문제이다.
예컨대「꾸르실료」라든지 혹은「울뜨레야」같은 특수성을 의미하는 단어는 용납이 간다하더라도 개회식 폐회식까지도 외래용어를 쓴다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끝으로「꾸르실료」의 중요성을 감안 한다면 그 교육 과정에 있어서 그 교육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도신부들이 수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구라파의 신앙의식구조와 한국적인 신앙의식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꾸르실료」의 특수성을 모르는 소리라고 도리어 핀잔을 던질지는 모르겠으되 오늘날 교회정신은 그 민족의 특수성, 그 지방의 특수성을 제아무리「꾸르실료」라고 하더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결실을 위해서, 더 많은 하느님의 은총을 위해서 더 많은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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