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9월은 우리의 순교복자들을 더욱 현양하고 그 유덕을 따르며 특별한 공경과 사랑을 바치는 복자성월이다.
한국교회사상 순교의 월계관을 쓰신 분들은 복자위에 오르신 103위 외에도 신유박해(1801), 기해교난(1839), 병오교난(1846), 병인대교난(1866) 등을 거치는 동안 무려 1만여명에 달했다.
한국교회는 우리민족 스스로가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우고 100여 년간 모진박해와 고난을 당하면서도, 더욱이 60여년간은 성직자마저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순교선열들의 피로써만 성장해온 자랑스러운 교회이다.
우리의 선열들은 당시 국사범으로 잡혀 그릇된 국법 앞에서 더 큰 정의와 사랑과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 기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오로지 생명을 바쳐 복음을 증거 한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랑스러운 신앙의 조상들의 명예로운 후손이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명예로운 후손이 되자면 진리와 사랑을 증거하기위해 생명을 바쳤던 순교의 얼을 유산으로 이어받아 있어야하며 이순교의 얼이 후손들인 우리의 크리스찬 생활 안에 마땅히 구현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부단히 그 유덕을 따르고자 노력해야한다.
그리하여 신앙의 조상들의 순교의 얼과 유덕을 현대에 구현하기 위하여는 정의와 진리를 증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옛날처럼 선앙의 자유나 호교를 위해목숨을 버려야할 시기는 아니다. 따라서 유혈의 순교까지는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죄악이 성행하고 하느님의 법도가 무너져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비구원적인 요소가 세상 안에 팽배해가고 있다.
따라서 순교의 얼을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현대 사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자신의 일상생활 안에서 어떤 어려움이나 장애가 있다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복음의 빛으로 진리와 정의를 증거 해야 한다. 현대의 많은 오류와 비도덕성은 우리에게 영웅적인 사도적 사명을 촉구한다. 이리하여 순교자적인 정신으로 복음을 생활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청되는 무혈의 순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자면 복음의 증거자로서 언제라도 온전한 자유로 기쁘게 생명을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한번 자문자답해 보아야한다. 그리고 이 자문자답은 우리들 생애에 걸쳐 가끔 되풀이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신앙의 열도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한다.
순교에 대하여 과거에는 호교적 의의와 그 용덕을 더 중시했으나 지난번 공의회는 그보다는 사목적 의의와 그 증거성을 더 중시하여 순교의 본래의 뜻을 되찾고 있다.
성서에서도 순교라는 말은 증거의뜻으로 사용되어왔고 구체적으로는 받은바 사랑에 보답하여 그 사랑을 증거함을 의미한다.
또 아우구스띠노 성인도『순교자들의 용덕에 놀라지 말고 그들이 고통을 이겨낸 것은 그들의 사랑대문이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순교는 주님께 대한극도의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한 사실을 그리스도처럼 세상에 증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순교선열들의 유덕을 따르자면 마땅히 사랑을 증거 해야 하며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과 이웃사람을 위해 순교자적 정신으로 희생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려는 부단한 노력과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만 한다.
복자성월이 되면 교구마다 본당마다 묘지나 성지순례 묵상기도회현양대회 기념행사 등 다양한 외부행사를 치른다. 그러나 만일 사랑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선열을 현양하는 정도에 그칠 뿐 큰 의미를 갖지 못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자신의 성화에 더욱 진력해야 한다.
순교는 모든 고통과 죽음을 무릅쓰고 절대자이신 하느님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쳐 신뢰하는 믿음과, 약속된 천상영복에 대한 열망에 불타는 희망과, 목숨을 바치기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극치를 이룸으로써 향주 삼덕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임 최대의 가장 뛰어난 덕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순교는 완덕의 절정이며 모든 덕행의 종합이며 성화의 극치를 이룬다.
다라서 순교 선열들의 후손들인 우리가 순교의 얼을 체득하고 그 유덕을 따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를 자신의 성화가 선행되어야한다. 그렇지 않고는 진리와 사랑을 증거 할 수도 없고 정의를 외칠 수도 없다. 따라서 세상의 성화는 더욱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의 순교선열들은 기쁘게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이 생명보다 더 귀중했기에 그러했을까? 그들에게는 신앙이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었으며 그 신앙을 통해서 더 귀중하고 가치 있는 생명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도 피와 목숨대신 용기와 희생과 봉사로써 순교의 얼을 더욱 빛내고 그 유덕을 이어받아 우리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히 이신앙의 유산인 순교의 얼을 상속해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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