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먹기만 하면 사는 것이 아니라 소화를 시켜야 살 수 있듯이 신자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교를 해야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는『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한다면 나는 불행하다』(꼬린토전ㆍ9ㆍ16)하였고 야고보 사도는『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2ㆍ26)라고 했으니 말이다. 일단 성경을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소화를 못 시키면 죽을 수밖에 없듯이 교회가 전교를 못하면 존속할 수 없고 교회는 신자가 모여서 된 것이니 우리가 구원될 수 없는 것이다.
한데 우리 중에는 아직도 대다수가 전교는 성직자나 전교회장이 하는 것이고 평신도는 미사참례나 하면 되는 것으로 잘못알고 있으니 전교의 달에 다 같이 제고해야할 문제라고 본다.
기실 전교의 암적 요소가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인 즉 자연법칙은 엄연해서 가득찬 물그릇에 값진 기름을 부어도 허사이듯이 그런 생각이 가득 차 있는데 아무리 전교를 강조해도 귀 뒤로 흘러버리니 말이다. 생각컨대 가지는 것 못지않게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즉 일본이 먼저 우리보다 상투를 잘라버리고 서구문화를 받아들였기에 선진대열에 서게 되었고 개신교가 우리보다 전교에 앞서고 있는 것은 벌써 그런 생각을 버리고 평신도가 전교에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그 생각부터 버려야 전교의 새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그에 속한 지체들이다.
모든 지체는 몸을 위해있고 유기적으로 협조를 하게 되어있다. 가령 운전수가 운전을 할 때 눈은 앞을 보고 손은 운전을 하고 발은 제동을 걸듯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사명은 복음전파에 있으니 우리는 그 손발의 역할을 해야 되는데 발이 되는 평신도가 마비상태로 앉은뱅이전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앉은뱅이가 성한 자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실감이 안 난다면 팔짱끼고 앉아서 책사위에 사과 한개만 먹어보면 오늘의전교의 고충을 피부로 느낄 것이다. 여하간 전교는 하느님의 뜻이며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니 신자는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자고로 의무에는 상벌이 따르기 마련이다. 즉 병역의무를 기피하면 처벌을 받게 되고 의무를 충실히 해서 공을 세우면 훈장을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나라를 위해 전교를 해서 주님 앞에 많이 무릎을 꿇었다면 천상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만일 전교의무를 회피하거나 냉담으로 탈영을 했다면 불행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때에 나도 모르겠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전교는 먼저 자신을 구하고 남을 구원하는 행위이며 주님을 기쁘게 하는 길이니 중대사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과연 얼마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는지 자타가 자성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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