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바로 며칠 전에 신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내셨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풀꽃입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가에 피어난 꽃도 있고 깊숙히 숨어 있는 꽃도 있습니다. 아마 그 향기는 바람받이에 있는 꽃보다 으슥한 곳에 가리워져 있는 꽃이 더 강하겠지요.
다만 가리워져 있다는 것뿐입니다. 아니、이런 비유는 어떠할가요? 여기 커다란 나무가 있읍니다.
그 뿌리와 둥치와 가지가 한 몸을 이루는 나무가 말이지요. 따라서 나무의 참 생명을 공급해 주는 뿌리를 아무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주더라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무의 뿌리는 뿌리인 것입니다. 그 뿌리가 있음으로써 나무의 가지와 잎새가 짙푸르게 될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인 것입니다』
신부님의 회답을 받아본 상이군인은 촛불을 밝히고 언제까지나 싱싱하고 건강한 이 나라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만드는 전기스탠드 밑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운 지식들로 밝디 밝아져 참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게 되어 달라고 말이지요.
그 다음 상이군인은 은방울 방송국의 달래 아가씨에게 그 사과 초를 보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경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왜냐하면 싸움터에서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아저씨는 달래 아가씨에게 가장 많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녀로 부터 듣게 되는 세상소식으로 말이지요.
달래 아가씨는 상이군인 아저씨의 편지를 받고 한 방울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과 초를 성모상 앞에 놓고 불을 밝혔읍니다.
사과 초는 발그스레하게 물들어져 마치 한 송이 피어나는 장미꽃과도 같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그 아름다운 빛깔! 달래아가씨는 그처럼 이 세상에 선과사랑이、그리고 진리가 승리하기를 빌고 빌었읍니다.
그런 다음 달래아가씨는 그 사과초를 저널리스트 클럽(신문ㆍ방송ㆍ잡지사ㆍ편집자ㆍ기자들의 모임)에서 가끔 만나 뵌 추기경님께 보내드렸습니다. 얼마 전 종교와 평화에 관한 아시아협의회 공동의 장이 되신 축하선물로서 말이지요.
마침내 추기경님께 도착한 그 사과초에는 달래아가씨만이 간직한 소망이 있었읍니다.
추기경님은 달빛이 곱던 첫여름의 어느 날밤 중세기의 고딕 풍으로 지어진 대주교관의 테라스 통나무의자에 앉으셔서 지난 성모 영보첨롓날쯤에 주교서품 1주년을 맞이하신 새 주교님이랑 또 다른 신부님들이랑 함께 그 사과 초를 밝혀놓고 녹음기를 통해 다음 노래를 듣고 계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추기경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시던 날 불렀던 「착한목자 지팡이를 내게」(마테오13ㆍ53~58、마르코6ㆍ1~6)라는 노래를 말이지요.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시었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었네. 주님은 명하셨다. 간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묶인 사람에게 해방을 알려라. 눈 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어라.
그래서 보내시었다. 나를 보내시었다. 예수님、이 몸을 축복하셔요. 나의 양떼 내 안에서 당신을 느끼며 하늘나라 파아란 풀밭 찾아가도록 착한 목자 지팡이를 내게 주셔요.』
갈바람과 마 바람이 손을 잡고 촛불의 툴레를 맴돌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촛불은 점점 더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어요. 그러자 대주교관 뜨락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잎새들도 그 촛불과 별빛을 번갈아 내려다보고 쳐다보면서 춤을 추는 것이었어요.
노래 소리도 점점 더 우렁차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어요.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시었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었네. 주님은 명하시었다.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억눌린 사람들을 놓아주어라.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도록 그래서 보내셨다. 나를 보내시었다. 예수님、이 몸을 축복하셔요. 나의 양떼 내 안에서 당신을 느끼며 하늘나라 파아란 풀밭 찾아 가도록 착한 목자 지팡이를 내게 주셔요』
사과 초는 점점 더 어둠을 밝히며 자기 몸을 불태우고 있었읍니다.
흘러내리는 촛물은 마치 핏방울과도 같았습니다. 이천년전 갈바리아 살에서 돌아가신 어느 분의 핏방울처럼 느껴졌읍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사과 초가 그 찬란하디 찬란한 마지막 빛을 발하는 순간 추기경님도 주교님도 신부님들도 모두 다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고 계셨어요.
『주님은 명하시었다.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 주어라.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도록
그래서 보내셨다. 나를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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