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혈루병을 앓아오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병을 치유하게 되는 장면이 신약성서에 기록되어있다.
이 장면은 대단히 감격스러운 장면으로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어도 감동은 여전하다.
신병으로 오래 신음하던 여인이 어느 날 기적을 행하여 물로 포도주를 빚고 죽은 자도 되살리며 귀신 든 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병을 치료한다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때 그분을 만나면 자기의 병도 나으리라는 기대를 가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는 물에 빠진 자가 지프라기라도 잡는다는 태도와 다른 것이었으며 요행을 바라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었다. 이 혈루병의 여인은 한 점의 의혹이나 회의를 가짐이 없이 온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력에 믿음을 가진 것이다.
수많은 무리들에 둘러싸인 예수를 뵙고자 이 슬픈 여인은 가만히 다가갔다 그리고 이 여인은 비록 예수의 축복을 직접 받지 못하고 그 옷자락만 스칠지라도 자신의 병이 나으리라는 굳은 신념으로 아무도 몰래 예수의 옷자락을 뒤에서 조금 만졌다.
다른 사람은 다 몰랐지만 오직한사람、이 사실을 알았던 이는 당사자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래서 그는 여인을 돌아보며
『여인이여! 그대의 믿음이 바로 그대의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위대한 명언이며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오늘 나는 나 자신과 또 주변을 돌아보며 성서의 이 장면을 상기할 적마다 부끄러움과 슬픔을 금치 못 할 때가 많다.
사실 우리들은 화려한 외식(外飾)에 비하여 영혼의 내용은 얼마나 많이 비어있는 것인가.
돈독한 신심이 결여된 신학지식이나 습관적인 의식(儀式)은 신앙과는 오히려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내가 못 믿는 것은 물론、자신이 자신을 보증하기도 어려운 불신의 시대에 처하여 있는 것이나 아닌가. 어떻게 하면 속지 않을까. 눈을 두리번거리고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좀 속여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불신과 거짓의 풍조는 만연하여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 우리를 대부분은 이러한 병에 들어있지나 않은가.
이는 정신적 생활에서부터 물질적 생활에 이르기까지、소위 지도자층에서부터 피지도자 층까지、도시에서 부터 농촌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빈부귀천、누구나의 의식구조에나 깊이 침투되어있는 고질병인 것이다.
내가 너를 믿지 못하고 네가 나를 믿지 못하는 구성원이 모인 사회에서 모든 일이 조화를 이루어 성취된다거나 혹은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다거나 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저 혈루병의 여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뵈면 자기의 병이 틀림없이 나으리라고 믿었던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신뢰감은 오늘의 우리들 모두가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성 회복을 위한 절대불가결의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감을 되찾을 때 우리는 가면을 쓴 얼굴로서가 아닌 참인간의 얼굴로서 천주 앞에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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