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부님!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불러봅니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고요히 사라져가던 임종 곁에서 무상한 인생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만 같았습니다.
성직 36년간! 일생을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일꾼으로 너무나 충실했던 신부님. 온후하고 순박하며 그리지도 친절하던 신부님. 그러기에 평생에 화 한번내지 않았고 속일래야 속일수 없었고, 우울하고 답답할 땐 즐겨 신부님 곁을 찾던 이들이 그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다정하던 신부님은 영영 가셨군요.
기대와 포부가 많았던 서품당시 대구 주교좌보좌 신부로 활약하던 4년간을 출발점으로 진해본당 신설을 위해 사찰을 점유하고 주민들의 반대로 피신을 해가며 눈물겨운 고생 끝에 오늘의 진해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6ㆍ25 전화로 포항에서 모든 것을 소실하고 빈손으로 경주에 부임하며 전후의 본당신부와 근화여중ㆍ고의 교장으로 그 재건에 얼마나 노심초사하였습니까? 일복도 많드시라! 1955년 부산초량에 부임하여 교구설립에 분망하면서 초현대식 성당을 손수설계, 감독하며 항도부산에 천주교를 보여 주었습니다.
현 구봉성단이나 전시(戰時)美대사관 저택 확보는 오로지 신부님의 노고의 산물입니다.
11년간 심혈을 쏟아 이룩한 초량본당을 떠나 다시 주의 포도밭을 찾아 범일동ㆍ온천ㆍ서면ㆍ장승포ㆍ김해 등지로 오가다가 신병으로 고생도 무척 하셨지요. 만년에 또 거제동본당을 신설하여 손수 마지막 작품인 2층 성전을 마련하셨군요!
그간 부산교구 20년史에 늘 같이 참여하여 교구행사마다 위원장으로 활약하시고 교구파동으로 각 본당을 전전해야했고 공의회 후 변동과 쇄신의 물결 속에서 권로회와 평의회가 하는 좋고 궂은일을 도맡아 중재다, 조절이다, 그 산파역을 다하셨지요.
또한 신부님은 사목자로서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즉 각 본당에서 활동하는 사도직단체들과 본당운영의 체제를 마련하였으니 부산교구에서 처음으로 신용조합ㆍJOCㆍ레지오마리에ㆍ학생회를 도입하시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시본당 조직체로 성당의 반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가정방문을 실시하며 본당홍보로「겨자씨」를 매주 발간하며 주보의 효시를 이룩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부산교구에 시대에 필요한 당신使者로 김신부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사망 며칠전『내가 까르멜수녀원 지도신부로 온 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했다』고 간신히 말씀하시던 신부님! 그러시기에 하느님은 신부님을 평생바라시던 영복(永福)으로 섭리하셨나봅니다.
김알렉시오 신부님, 아니 형님! 지난 봄 일선땅굴시찰을 같이 하던 일과 둘이서 동창회회합과 서울나들이를 하던 것이 이젠 마지막 여행이 되었구려!
김신부님, 아니 술잔을 같이할 형님. 형님은 가시고 주의 목장에 같이 피리를 불어줄 목자도 없으니 이 안타까운을 어디 말하오리까…
이제 무상의 현세를 벗어나신 신부님. 평생기리고 바라던 하느님 곁에서 영복을 길이길이 누리소서!
1978년 11월 19일 선종 한 달을 맞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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