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비록 불구이나 소중한 남편이 있고 한시도 제가 움직이지 않으면 생활해 나갈 수 없는 삶이 있기에 역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다시금 저의 생활에 몰두 해야만 했읍니다.
그러던 그 이듬해、
그러니까 1977년 이해야말로 남편에게는 생활의 일대 혁신을 가져온 해 였읍니다.
남편이 건강을 잃은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수백릿길 나들이를 갔다 온 것입니다.
부활절을 막 지낸 1월 하순경 본당 신부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서울 절두산 성지 순례대열에 참가하여 서울을 다녀왔고 가을에는 전년도 수상자라 하여 수원시장의 초청으로 수원 화흥 문화제에 참석하고 왔으며 전주에서 있었던 복자 현양대회에도 다녀왔고 심심하면 동네 친구들이나 성당 청년들과 같이 물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 하루 종일 철엽을 즐기다 오기도 하였읍니다.
실로 이러한 일들은 남편에게 있어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읍니다.
남편이 차를 타고 어디를 간다거나 하물며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기에 남편은 어디를 한 번 다녀오면 마치 해외교포가 몇 십년 만에 조국을 찾아와 눈부시게 발전한 조국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 만큼이나 신기해하고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읍니다.
처음 나들이로 서울 성지 순례를 갈 때는 여행길에 무리가 되어 병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레임으로 잠을 푹 자고 일어나야 할 전날 밤을 밤새껏 잠을 못 이루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이고 일어나는 남편 이었읍니다.
봄비답지 않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도착한 절두산 성당.
이름 그대로 죄인들의 목을 베어 처형하던 곳이라 하여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곳. 망나니의 칼날아래 무참히 숨져간 우리 순교선열들의 순교정신과 신앙심을 추모하고 후세에 길이 빛내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성당을 짓고 이름 하여 절두산 성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나 봅니다.
그 옛날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무슨 죄인이라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목을 베었단 말인지. 일행은 성당으로 들어가 본당 신부님의 간단한 말씀을 들은 다음 성당 지하실에 안치 되어있는 복자들의 유해를 참배하고 갖가지 유품들이 진열 되어있는 기념관에 들어가 그분들이 남기고간 성물들을 대했을 때는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야했으며 숨이 금방 넘어가 벌릴 것 같은 아픔과 고통을 당해야 했던 온갖 형구들을 보았을 때는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장열히 순교를 하였던 거룩한 순교선열들 무쇠보다 강하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보다 더 뜨거웠던 그분들의 신앙에 비하여 너무도 보잘것없고 미천한 자신의 믿음이 부끄러운 얼굴을 붉히며 지금은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있을 순교선열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구하면서 절두산 성당 참관을 마치고 나왔읍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순례 행렬과 작별을 해야 했읍니다. 남편이 너무 무리가 될 것 같아 서울에서 며칠 쉬면서 오랜만에 온 서울이니 여기저기 구경 좀 하다 돌아가기로 하고 남편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영등포 신대방동에 있는 상이용 사촌 옆에 여관을 잡아 들어갔읍니다. 15년 만에 접해보는 서울거리와 외부세계의 모든 것들은 남편에게는 마치 이방지대에 온 사람같이 생소하고 신기한 것들 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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