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權座에서 물러난 후 사형이 확정된 파키스탄 前 수상 부토의 최근 옥중 생활이 外信으로 전해졌다. 一國의 수상으로서 어제의 영예와는 거리가 먼 한날 사형수로서의 그는 인생의 無常을 뼈저리게 느끼며 감방에서 고도고가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초라한 사형수 부토-그를 반겨준 것은 평소 끔찍히도 따랐던 그의 忠犬뿐이었다고 外信은 전한다. ▲宰相과 그의 말의 죽음을 풍자한 한국 속담이 생각난다. 힘 있는 자에 아부하고 만사를 자신의 이해관계와 결부시키는 타산적인 생각과 행동은 東西古今을 통해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물론 역사적인 인물 중에는 四六臣처럼 오직 신의에 살고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불사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충절을 이토록 우러러 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는 바로 이런 의리를 찾기가 지극히 힘들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인간은 대체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려 들지 않는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는가하면 반대로 어제의 友情도 필요하다면 눈 하나 깜짝 않고 팽개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러한 타산적 사고는 문명이 발달하고 또 생존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더욱 심화되어가는 느낌이다. 각종 公害에 찌들대로 찌든 都會의 人心이 흙냄새 나는 시골의 人心보다 훨씬 거친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삶」自體를 하나의 전쟁에 비유하기도 한다.「삶」을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이 非情한 생리도 어쩌면 변명이 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그것은 싸움터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삶」자체를 이렇게 본다는 것은 공동체의 이익 보다는 個個人의 이해관계를 지나치게 重視한데서 나온 결론이다. 특히 모든 인간들이 현세적 권력욕이나 황금욕에 집착하게 될 때 그 사회는 비정한 사회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소위 말하는 人情과 義理는 찾을 수 없게 된다. ▲예수에게서 現世的 영화를 기대했던 수많은「예루살렘」주민들의 그 약살 빠른 계산은 어쩌면 인간심리의 나약성을 웅변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도 우리주위엔 수없이 많은 非理가 행해지고 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살기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란 핑계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짓밟게 되는 이 행위는 곧 2천년 전「예루살렘」주민들처럼 또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는 일이란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참 사랑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