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고향이 그리워 필닐니리./보리피리 불며 꽃청산/어릴 때 그리워 필닐니리./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 필닐니리./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蔑山河/눈물의 언덕을 지나 필닐니리.
韓何雲의「보리피리」가 자꾸만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광주에서 녹동까지 고흥반도의 자갈길을 달리는 차중에서도 나는 연속 그 생각에 젖어 있었다.
지지난 해 여름이었다. 어느 司祭의 부탁으로 용무가 생겨 소록도를 향해 여행길에 올랐다. 鹽海의 소읍 녹동에서 물길을 가로질러 불과 500여 미터. 소록도는 그렇게 指呼之間에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일로 다녀오고 싶었었지만 일곱시가 지나면 뱃길이 끊긴단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날 밤을 녹동에서 지새고 다음날은 일찌감치 도선편으로 소록도를 밟았다.
한동안 世人들은 소록도란 말만 들어도 언짢게 여겨왔다. 天刑의 나환자가 유배당한 곳이라는 인식 때문 이었으리라.
그러나 여기에도 삶이 있고 사랑이 있고 景色으로 말하면 가히 영주에다 비길만한 남해특유의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런데 오직 한가지 나환자가 산다는 이유 만으로 絶島가 되어버린 이 소록도.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섬에도 주님의 사자들이 소리 없이 찾아들어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었다. 실은 나도 그런 분을 만나고 싶어 이 섬을 밟은 것이다.
나는 부두에서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이 있는 나환자의 마을은 부두에서 약 삼마장 쯤 떨어진 오지에 있었다. 이 섬을 허리질러 나환자촌과 일 촌이 구분되어 있었다. 내가 길을 물어 그곳에 갔을 때는 이미 병원은 붐비고 있었고 그분들은 흰 옷 입은 천사가 되어 부지런히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분들은 둘 다 오지리에서 온 외국 수녀들로서 삼십대의 어여쁜 聖處女였다
누가 이분들을 뽑아서 나환자들의 종살이를 시키는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녀들 자신의 마음 안에서 피어난 사랑의 염염한 불길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 역한악취가 뒤범벅이 된 병실 안에서 하루도 아닌 삼백예순날을 그 썩어 문드러진 그야말로 만신창이의 나환자들을 애인을 매만지듯 더운 손길로 쓰다듬어내는 그 장한 모습 속에서 나는 시종 살아계신 주님을 뵈옵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 중에 누가 감히 그런 흉내 나마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수만리 이국땅. 그것도 버림받은 天刑의 나환자들 속에서 곱디고운 청춘을 불사르는 그 고된 노역을 이 땅의 어느 젊은 아가씨가 감히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문득 다미안 신부님의 전기를 되살렸다 스스로 십자가를 어깨에메고 나환자들 속으로 뛰어든 그분. 그리고 끝내는 나환자로 변신하여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눠 갖던….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15 ㆍ13)
나는 이들 聖處女의 애틋하도록 거룩한 표정 속에서 다미안 신부님의 受難像을 읽었다.
天刑의 유배지 이곳 소록도. 아름다운 지명조차 버림받은 이런 인간오지에 사랑이 국경을 넘어 파도처럼 밀려온 이 희귀한 사실 앞에 나는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때 문득 何雲의「보리피리」를 되뇌이는 입술사이로 하느님의 말씀이 묻어나왔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들 말까지 한다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읍니다」(꼬린토전서13 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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