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어느 누구에게나 두렵고도 원망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누구 부럽지 않는 금력과 권력을 누리고사는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한세상을 눈물 속에 살아온 불행한 사람에게도 역시 두려운 것이다. 오직 명예만을 지키며 흔쾌히 죽음을 감수하겠다던 전 파키스탄 수상 부토도 마지막 순간에는 회환의 통곡을 남긴 채 교수대에 오르지 않았던가. ▲죽는 것은 잠자는 것/그 뿐이다. 매일 잠잠으로써 우리의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수천가지 피치 못할 충격을/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열열히/원할 극치-이것은 섹스피어가 그린 비극적인간의 상징 햄릿이 내뱉은 독백이다. 世事에 시달린 햄릿은 죽음 속에서 나마 인생의 도피처를 찾으려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역시 죽음은 두려운 것이었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 아마 꿈을 꾸겠지. 아 이게 곤란해」하며 그는 번민에 잠긴다. ▲한국에서도 일찌기 죽음을 예찬하는 문예 사조가 잠시 유행한 적이 있었다. 朴鍾和ㆍ羅도향ㆍ洪思容 등「白鳥」同人들을 중심으로 한 감상적인 낭만주의 사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회색의 죽음을 찬미한 것도 사실은 고통스런 이 세상에서의 돌파구로서 죽음을 想定하게 된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죽음 그 자체를 그렇게 갈망한 것은 아니다. 단지 3ㆍ1운동 후의 사회적ㆍ민족적 좌절과 절망이 그들의 청년적인 감상과 흥분으로는 차라리 죽음의 고통보다도 더 큰 괴로움으로 느꼈을 뿐이다. ▲修辭學的으로 아무리 아름답게 묘사한다 해도 죽음은 역시 두려운 것이다. 죽음이 이토록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완전한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에는 동행이 있을 수 없다. 마치 이 세상에 올 때 혼자였던 것처럼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또한 혼자서 외로이 맞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죽음은 더 한층 두려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죽음의 공포 앞에 절망하던 인류에게 오늘 그리스도 부활의 메시지는 영생의 기쁨을 심어주고 있다. 이는 죄의 권세와 죽음이 고통에서의 해방의 메시지이며 또한 이것은 온갖 죄악과 과오로 점철된 인간도 용서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으며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굳은 신앙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복음말씀은 우리 모두의 믿음의 기초이자 삶의 희망인 것이다.